


당시 덩샤오핑의 우려는 폴란드 자유노조 "솔리대리티" 이 한 단어에 응축되어 있었다. 1989년 티엔안먼과 동부 유럽에서 일어난 그 모든 일 이 후 이는 <샤오핑小甁>의 악몽이었다. 레흐 바웬사의 지하 노동조합이 폴란드 다수를 받고 국제 노동조합 단체, 바티칸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민주 지식인, CIA이 마구 뒤섞여 다함께 폴란드 공산당을 교섭에 나서도록 하고 그 후 권력을 떠나게 헀던 도식...
이 전부가 비폭력적으로 혹은 폭력이 거의 없이. 지앙쩌민은 무엇이 자신의 후원자를 괴롭히는지 이해했다. 1990년 초부터 세계에 대한 개방 및 한 층 더 나아가 미국과의 신실한 무역 협약 전략을 추구하면서 범죄와 반체제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이와 어우러졌다. 공안부장 타오스거우가 친히 진두에 서서 이끌었던 탄압.
브뤄셀의 SOIr지 및 France Inter의 베이징 특파원인 에릭 마이어는 " 타오스거우는 모든 종류의 태업 및 시위 계획을 사전에 찰지할 수 있는 개입 여단을 창설한다고 발표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계속해서
" 그러나 les Nouvelles de la Sécurité publique 공안 신문 11/13일자에서 인적 물적으로 대내 및 대내 첩보/염탐을 강화할 것을 주장/요구했다. 이상하고 극단적으로 들릴 수 있는 견해지만, 그 때 베이징은 이미 가게 하나하나마다 염탐꾼과 밀고자들이 우글거리고 있으며, 예를 들어,모든 외국인(장학생에서부터 기업인까지)과 그들과 어울리는 중국인들의 자그마한 행동 하나하나를 추적했다.
홍콩 모닝 포스트 지 보도에 따르면 대외적으로는 중국은 외교관이나 언론인 신분으로 해외 공관 특히 미국과 소련에 배치된 비밀 요원들을 대대적으로 증원할 계획이다.
" 이 모든 것은 두 가지를 보여준다. : 오늘날 첩보/염탐은 이 독재 정권의 생존을 보증하는 가장 강건한 /굳건한 지주 중 하나이며 중국은 이 업무에 비용을 따지지 않고 돈을 쓸 것이며 그 것도 더욱 더 많이! 15"
개혁파에게 타격을 날린 것 같은 티엔안먼 이 후의 상황에 직면하여 전 특무기관의 총수로 1989년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는 것을 주저헀던 치아오스는 의회에 보다 높은 비중을 부여하고 공산당의 역할을 상대화하기를 갈망하였다....
1990년대 시작된 보다 어려운 논쟁으로 지도부들은 자신들의 부하를 승진시키는 것을 가림막할 목적을 숨긴 체 덩샤오핑과 그의 업적에 대한 개인 숭배를 개시헀다.
비록 그들이 1949년 상하이에서 비밀지하(운동) 집단에 있었긴 했지만 이 둘- 지앙찌민과 치아오스- 사이에는 존중이 없었다. 치아오는 당내에서 보다 큰 영향력을 향유했으며 1989년 6월의 사건에 즈음하여 지앙에게서 총서기 자리를 빼앗아 오기를 몹시 바랬던 것 같다.
당시 농담 중 이런 것이 있었다: 강(江)이 가라앉으면 돌(喬石)이 높이 드러난다. *
중남해는 치아스에게 반체제 인사 색출을 조직할 것을 맡겼지만, 이 위협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희미해졌다. 자앙과 그의 상하이방은 새로운 개혁안이 부상할 것을 우려하는 늙은 보수파들의 도움으로 그를 밀어붙여 퇴출/퇴장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종간을 한 번 움직이는/꺾는 것 같이 단번에 치아오스를 제거할 수는 없었다. 후자가 보이지 않는 연줄, 투명관계를 정보계 내에서 유지하고 있는 것은 당연했고 런지엔신 중앙정법위원회 서기 같이 핵심 직책에 일부 자기 사람을 앉혔는 데 이 위원회는 정보업무를 감독했는 데 루오간이 부서기로 있었고 또 한 국가안전부장 지아춘왕도 그 일원이었다.
The Hong Kong journalist Willy Wo-Lap Lara describes the mindset deng about this in china after Deng Xiaoping (The Power Strnggle in Pékin since Tuutantntn), P.A. Professional Consultants Lld, Hong Kong, 1995.
15. « La Chine investit massivement dans l'espionnage » in Lt Soir, 19 décembre 1991. En 2008. Éric Mey cr publie de Pékin une lettre d'informations Le vent de la Chine : www.leventdelachine.com
* 강락출석江落石出/水落石出 강/물이 가라앉으면 돌이 드러난다.
Une cohabitation assez compliquée si l'on considère par exemple les accrochages entre Luo Gan et Qiao Shi, suite aux événements de Tiananmen pour le contrôle de la Police armée populaire (PAP), alors estimée à 800 000 hommes, et qui est passée de la tutelle de la Sécurité publique à celle de la Commission militaire centrale du parti que va présider Jiang Zemin après la mort de Deng Xiaoping en 199716.
Un autre dirigeant pourtant inféodé à Qiao Shi s'occupe désormais de problèmes de sécurité : Wei Jianxing dirige à partir de 1992 également la Commission de discipline du parti.
Tout en tenant compte de ces responsables placés en embuscade, le secrétaire général Jiang Zemin doit favoriser l'ascension de ses propres hommes, en général liés au clan de Shanghai. Le plus important, aux attributions similitaires à celles de Qiao Shi dans la nouvelle période, c'est Zeng Qinghong, celui à qui a été imparti de former un Conseil de sécurité.
Ce Hakka originaire de Shanghai est « monté » à Pékin avec Jiang Zemin, dont il est le secrétaire au moment de l'affaire de Tiananmen. Il est le fils de Deng Lujin, une héroïne de la Longue Marche et du général Zeng Shan, instigateur du premier soviet chinois dans le Jiangxi, arrivé à Yan'an, en provenance de Moscou en 1937 avec Kang : Sheng, le « maître des ténèbres », et futur ministre de l'Intérieur17.
De 1993 à 1997, Zeng sera le patron du très puissant Département des affaires générales du PCC au sein duquel sont élargies certaines ; fonctions habituellement dépendantes du secrétariat, dans lequel on j doit tenir compte des diverses factions. Il commence par accroître son personnel désormais au nombre de 350 fonctionnaires18. Ces secteurs incluent la recherche politique, la politique économique, les archives du parti et la sécurité rapprochée des dirigeants.
Comme l'avait fait Mao, Jiang Zemin accorde de l'importance au Bureau centrai des gardes et à ses régiments, réorganisés après Tiananemen avec à leur tête Yang Dezhong — l'ancien garde du corps de Deng Xiaoping — et surtout You Xigui, son propre gorille shanghaïen. Ce dernier sera promu général, et sa présence constante auprès de Jiang, en particulier dans les voyages à l'étranger, indique que le chef du Bureau central de sécurité ne se contente pas de protéger physiquement les dirigeants, mais joue un rôle de conseiller et de pilier du renseignement politique.
Autre exemple d'organisme qui monte en puissance à la fois sur I le plan renseignement et décisionnel,, le Bureau de recherche politique (Zhengçeymjiushi.), dirigé par "Teng Wenshëng qui était autrefois un responsable du Bureau d'investigations du parti (zhongyang diaochabu), mais qui a partir de la mi-juin 1989, avec l'arrivée de Jiang Zemin au premier plan, a été chargé d'animer le nouveau service" 19.
À l'ère Jiang Zeminfe, une myriade de « groupes dirigeants de travail » (gongzuo lingdao xtaozu) concernant les problemes stratégiques et sécuritaires voient le jour : sur « les affaires de Taiwan »,« pour maintenir la stabilité sociale », « sur la sécurité nationale », i tutti quanti... De même, Zeng Qinghong va reformater l'organisme dépendant à la fois s du gouvernement, le Conseil des affaires d'Etat, et du parti, chargé de définir les grands axes de la diplomatie, le Bureau pour les affaires étrangères (.Zhongyang waishî) connu aussi sous son appellation anglaise de Central Office for Foreign Affairs (COFA).
16. Murray Scot Tanner, The Institutional lessons of disaster : reorganizing the,People's Armed Police Afier Tiananmen,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17. Voir sa biographie : Su Duoshou, Liu Mianyu, Zeng Shan Zhuan, Jiangxijj Chubanshe, 1999. Et celle de Zeng Qinghong : Wu Kegang, Zeng Qinghong Zhongong Xiang'ao da guanjia, (Zeng Qinghong, le gardien de Hong Kong ctï| Macao), Xinhua Publishing, Hong Kong, 2004.
18 Zeng Qinghong assistants within the department of organization arethen Yang Dezhong >(depuis 1982), replaced in 1997 by You Xigui ^ WangRuiHin(1983), Hu Guangbao {1993), ChenFujin (1994), Wang Jang(;i994) which will replace Zeng Qinghong in 1999 to the FCC - Jiiang Yikang General Affairs Directorate (1996)
19 Teng Wensheng is a 'policy' as demonstrated by the fact that it happened to him to write some speech of Deng Xiaoping and there rank of Minister at the turn of the Millennium when he will be replaced at the head of this service by Wang Huning. .Central Office for Foreign Affairs (COFA).
(이런) 동거는 이를테면 티엔안먼 사태 이 후 당시 80만명에 달했던 인민무장경찰의 통제권을 둘러싼 치아오스와 뤄간 사이의 충돌을 고려/감안하자면 매우 어려운/까다/껄끄로웠는 데 이는 1997년 덩샤오핑의 사망 이 후 공안부에서 지앙쩌민이 주석으로 있는 당 중앙 군사위원회로 감독권이 옮겨졌다 16.
보안 문제를 책임지면서도 치아오스에 복종하는 또 다른 지도자로 웨이지엔싱이 있었는 데 그는 1992년부터 또 한 중앙기율검사위원회를 지도하였다.
이런 관리/책임자들이 잠복해있는 것을 고려할 때 총서기 지앙쩌민은 자기 사람이 부상하는 데 특혜를 주어야 했고 이들은 일반적으로 상하이방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이로 새로운 시대에서 치아오스와 비슷한 권력을 지닌 이, 그가 쩡칭홍이었으며 그는 (국가)안전회의를 창설하라는 명을 부여받았다. 상하이의 객가 출신인 그는 지앙쩌민이 티엔안먼 사태로 총서기가 된 지앙쩌민과 함께 베이징에 "박아/박혀졌다". 그는 장정의 여걸인 덩류진과 쩡산 장군의 자식으로 쩡산은 장시성에 건립된 중국 최초 소비에트의 추진자였고 "어둠의 지배자" 캉성과 함께 1937년 모스크바에서 엔안에 도착하였으며 이 후 내무부장을 지냈다 17.
1993년에서 1997년, 쩡이 중국공산당의 막강한 중앙 판공청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조직이 확대되었는 데 이 기구는 보통 서기처에 종속되어 기능하며, 여러 분파/파벌을 고려해야 했다.
이는 조직 인원을 현재의 350명으로 늘이는 것으로 시작했다 18 . 그 부문으로는 정책조사/정치조사 경제정책, 당의 문서와 지도부에 대한 근접경호가 있었다. (政治研究局、经济研究局 --> 중앙정책연구실? )
마오가 그랬던 것처럼 지앙도 중앙경위국과 그 경위단을 중시 여겼는 데 이는 티엔안먼 이 후 그 책임자인 양더중-이 전 덩샤오핑의 경호원- 과 특히 그 자신의 경호원인 요우시구이에 의하여 조직이 개편되었다. 후자는 장성으로 승진하여 항상 지앙쩌민의 곁에 있었고 특히 해외 순방시 동행했는 데 이는 중앙경위국장이 단순히 지도자의 신체적 경호뿐만 아니라 자문 및 정치 정보에서 한 축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가리켰다.
정책 결정 및 정보 양측면에서 권력으로 떠오른 또다른 조직의 예는 텅원성滕文生이 이끄는 중앙정책연구실로 그는 예전에 당 연구실(중앙조사부? 서기처 연구실?)의 책임자 중 일원(연구실 이론조장)이였으나 1989년 6월부터 시작하여 지앙쩌민이 제1인자로 부상하면서 이 새로운 기구를 이끌게 되었다 19.
지앙쩌민 시대에 전략과 안보 문제에 관한 무수한 공작영도소조들이 부상했는 데 여기에는 <대만 공작영도소조> <위호온정공작영도소조> <국가안전영도소조> 기타 등등이 있다.
비슷하게 쩡칭홍은 정부 즉 국무원과 당 양쪽에 속해있으며 외교 문제의 중축을 규정하는 기구인 외사판공실(중앙외사)를 재편성했는 데 이 기구는 영어명칭인 중앙외사판공실Central Office for Foreign Affairs (COFA)로도 알려져 있다.
16. Murray Scot Tanner, The Institutional lessons of disaster : reorganizing the,People's Armed Police Afier Tiananmen,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17. Voir sa biographie : 蘇多壽,劉勉玉, 曾山傳 江西人民出版社 , 1999
Et celle de Zeng Qinghong : Wu Kegang, Zeng Qinghong Zhongong Xiang'ao da guanjia, (Zeng Qinghong, le gardien de Hong Kong ctï| Macao), Xinhua Publishing, Hong Kong, 2004. 吳克剛, 曾慶紅: 中共港澳大管家, 新華彩印出版社
18. 중앙판공청에서 쩡칭홍 휘하의 부주임들: 양더중杨德中(1982년 이래 중앙판공청 1부주임 겸 경위국장)은 1997년 요우시구이由喜贵 (94 부주임 경위국장)에 의해 교체 (중앙경위국장 겸임), 왕루이린 王瑞林 (1983년) 덩샤오핑 판공실 주임 겸임, 후광바오胡光宝 (1993년) ~92, 천푸진陈福今(1994년) 1993, 왕강 王刚 (1994년) 1999년 쩡칭홍 후임 중앙판공청 주임, 지앙이캉姜异康 (1996년) 1995 현 산동성 서기
19. 텅원성은 덩샤오핑의 담화 일부를 작성하게 되었다는 데서 나타나듯이 정치적 인물이었으며 세기가 전환할 시점에 부장급 반열이었고 그 후임으로 왕후닝이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에 취임하게 된다.
중앙서기처 연구실 --> 중앙정치체제개혁연구실 --> 중앙정책연구실中共中央政策研究室
滕文生
历任中共中央书记处研究室副研究员、研究员、理论组组长、副主任,「中国职工思想政治工作研究会」常务理事,中共中央顾问委员会副秘书长。1989年起任中央政策研究室副主任,1997年升任主任。2002年年轉任中共中央文獻研究室主任。
The Security Service's role in support of the law enforcement agencies is clearly increasing and it is likely to continue to do so.
한 동안 발매가 끊어져서 중단된 건가 헀던 우국의 라스푸틴 이 번에 완결편까지 세 권이 한 꺼번에 나왔군요.
지금은 자금 사정상 구입은 힘들지만 당장 완독했습니다.
작품 소개 및 평 참고 (http://blog.daum.net/mooncourt/8473484)
이 작품의 실제 주인공인 사토 마사루와 작품의 주 의 무대가 되는 지난 2002년의 스즈키 무네오 사건에 대해서 전 사건 초기부터 관심을 가지고 관련자료를 모으고 흐름을 추적해왔습니다.
그래서 이 걸 한 번 정리를 해 보려고 꽤 생각만 한 게 어느 덧 10년이 흘렀군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이 번 라스푸틴 완간을 기념으로 이 건에 대해서 그리고 이 사건의 주인공인 사토 마사루라는 인물에 대해서 제가 품고 있는 바
를 조금이나마 풀어볼까 합니다. (이 번에는 작심 삼일이 되지 않도록 기원해 주시길..)
일단 사건의 배경 개요나 전개 의미(특히 제가 바라보는 시각에서)에서 나중에 올리고 우선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 특히 일본쪽 인물들과 그 실제 모델이 된 이들에 대해서 먼저 올립니다. 이 작품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들은 거의 실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이는 각종 언론 보도 및 이 후 관련자 (특히 사토 마사루)의 각종 저작, 기고물에서 언급되고 있어 이 저작을 먼저 읽은 저로써는 작품을 볼 때 아 이 건 누구구나 이런 걸 찾아내는 것도 꽤 흥미 중 하나였습니다.
전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東郷 茂徳 한국계) 손자. 라이덴 대학, 산타바바라 대학 객원교수
2006년 일본 귀국 서울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역임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71102026002
고토 료 - 마에지마 료 前島陽 국제정보국 분석1과 수석사무관, 구주국 러시아과 러시아 지원실 과장보좌(총무반장)
아리토 - 무토 아키라 武藤顕 외무성 (이 후 국제정보통괄관 제4국제정보관, 러시아 과장, 총합외교정책국 총무과장 현 보스턴 총영사)
테라우치- 코데라 지로 小寺次郎 구주국 러시아과 과장 99 ~ 02 (이 후 주오스트리아 공사, 주 UN대표부 공사.대사, 국제정보통괄관, 구주국장, 현 사우디 아라비아 대사)
타지리- 시게타 히로시 茂田宏 주 소.러 공사 90~국제정보국장 96 ~97 ( 이 후 주 이스라엘 대사, 국제테러 대책 담당 대사)
작중 부처 "타지리" 일제 점령시 한반도 출생. 주한공사 ~96 및 북일교섭 담당 대사 역임
마츠모토- 마츠다 쿠니오 松田邦紀 러시아 과 과장( 이 후 주 이스라엘 공사, 주 디트로이트 총영사 현 인사원 파견 인사원 공무원연수소 부소장 )
작중 요정 유아 플레이 주인공. 해당 시점 당시는 러시아 과 수석사무관 (95)
주 디트로이트 총영사 재직 시절 디트로이트 시 위안부 소녀상 건립 방해 공작 가담
토모사다 -오카모토 유키오 岡本 行夫 전 외무성 북미국 북미1과장 , 총리 보좌관
외무성 사직 후 외교 평론가 전직. 이 후 하시모토, 고이즈미 내각에서 총리대신 보좌관
내각관방 참여, 외교 고문 등 역임 특히 이라크 문제 담당
루블 위원회 관련
오니시 - 코니시 마사키 小西正樹 러시아 대사관 총괄참사관 공사(이 후 짐바브웨 대사, 지구협력 담당 대사 역임)
타하라 - 하라다 치카히토 原田親仁 러시아 대사관 참사관 .구주국장 (이 후 체코 대사, 현 주 러시아 대사)
무라야마 - 야마무라 요시히로 山村嘉宏 2등 서기관 (총무 담당 )루블 위원회 추궁 2005년 11월 훗카이도 오키나와 위원회 (작중 등장)
2005년 11월 오키나와.홋카이도 특별위원회 루블 위원회 추궁
http://www.daichi.gr.jp/html/saishin17-12-06.html (작중 등장)
정치가 (스즈키 제외 작중 모델 언급 인물 특히 전직 총리. 대신 생략)
츠즈키 미네오都築 -스즈키 무네오 鈴木宗男
고토 고지 가토 고이치 전 자민당 간사장
카와나카 이치타 - 나카가와 이치로 中川 一郎 전 자민당 국회의원, 스즈키가 비서로 봉직.
농림수산 대신 과학기술청 장관 역임. 자민당 보수 강경 노선 세이란카이(青嵐会) 나카가와 파 영수 1982년 총재 선거 패배 이 후 1983년 변사(자살)
작중 서적 <민사- 가와나카 이치타 괴사사건>는 그 죽음을 다룬 "悶死 中川一郎怪死事件"의 패러디
쇼타- 나카가와 쇼이치 中川昭一
나카가와 이치로 아들. 이 후 자민당 국회의원, 전 농림수산.재무대신 역임
2009년 총선 낙선 이 후 사망
기타
이마다 히데아키 -이이다 마사히데飯野政秀
미츠바-미츠이 물산 산업프로젝트부 팀장 産業プロジェクト部チームリーダーだった
쿠니시리 발전기 사업 관련 체포. 유죄 선고
타카무라 -니시무라 西村尚芳 도쿄지검 특수부 검사 (사토 담당 검사)
카토 - 사토 레이코 佐藤玲子 전 스즈키 무네오 비서 (암투병 중 체포. 이 후 석방 사망)
러시아
보리스 엘친 대통령
보리스 부르불리스 전 러시아 공화국 국무장관(현재 대통령 행정실장) 겸 제1부수상 (이 후 상원의원)
타티아나 디야첸코 옐친 차녀 대통령 이미지 담당 보좌관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행정부 의장(총리)
올레그 소스코베츠 행정부 제1부의장
아나톨리 츄바이스 전 행정부 부의장, 대통령 행정실장
코르자코프 대통령 경호대 SBP 대장
미하일 바르수코프 연방안보부 FSB 부장
타르피시체프 대통령 보좌관 겸 국가 체육관광 위원장
블라디미르 푸틴 전 행정부 의장, 대통령 (이 후 행정부 의장 현 대통령)
세르게이 이바노프 FSB 차장.분석 예측본부장, 국방장관( 이 후 행정부 부의장)
일라인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공산당 제2서기
겐나니 야나예프 전 소련 부통령
이스라엘
가브리엘 고로데츠스키 GABRIEL GORODETSKY 텔아비브 대학 교수.커밍스 러시아.동부유럽 센터, 쿠리엘 국제연구 센터 소장
http://www.tau.ac.il/~russia/The_Cummings_center_series.htm
일단 만화 이야기니까 만화 밸리로 올립니다.
P S
번역의 수준은 몰라도 실제 모델까지 소개하는 부분에서 꽤 세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음. 총리를 비롯한 정치인들은 그렇다 쳐도
사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그 아오야마 학원 대학 교수까지 언급하는 걸 보면
베이징정보기술응용연구소 BAIT 관련 국가안전부 인사 MSS personnels affiliated with BAIIT
성명 | 국가안전부 직책 | 병행 직함 |
*류롱핑 (刘容平) |
국가안전부 16국 국장조리 国家安全部第十六局局长助理(국가정보보안기술입법심포지엄 国家信息安全技术立法研讨会2002 참고), 국가안전부 정보화센터 국장조리 国家安全部信息中心局长助理(정보자원 개발 이용 고위 포럼 信息资源开发利用高层论坛2004 참고), 하이난 성 국가안전청 부청장 海南省国家安全厅副厅长(2005 임명 참고) |
|
천정취엔(陈正川) |
국가안전부 정보화센터 연구원 国家安全部信息中心研究员(정보자원 개발 이용 고위 포럼 信息资源开发利用高层论坛2004 참고) |
베이징정보기술응용연구소(중국정보화협회 회원대표대회 정보화발전전략 고위포럼 中国信息协会第四届会员代表大会暨信息化发展战略高层论坛2005 참고1, 2) |
장선(张森)
|
국가안전부 16국 安全部16局(중국전산학회 컴퓨터 보안전문위원회위원 참고) |
베이징정보기술응용연구소 (정보 보안 전문지 학술논문, 2002 참고) |
자오빙(赵兵) |
국가안전부 정보화센터(중국정보화협회 정보보안전문위원회위원 中国信息协会信息安全专业委员会主任委员참고), 부국장(2011 참고) |
베이징정보기술응용연구소 컴퓨터실 주임(정보자원 개발 이용 고위 포럼 信息资源开发利用高层论坛2004 참고), 연구원(국가 863계획 인터넷 지리공간 관측 발견. 예보기술 프로젝트 팀 참고) |
안전화 (安振华) |
국가안전부 국장 安全部 局长(중국전산학회 컴퓨터보안 전문위원회 참고) |
베이징정보기술응용연구소 부소장(정보자원 개발 이용 고위 포럼 信息资源开发利用高层论坛2004 참고), 소장(중국정보화협회 제5기 이사 中国信息协会第五届理事 참고) |
* 류롱핑은 이 후 하이난 성 기위 부서기로 전보되어 지금까지 재직하고 있다.
또 한 전국지리정보표준기술위원회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이 위원회의 제3기 위원명단에 완지엔쥔阮建军이 국가안전부 16국 정보기술연구소 소속으로 올라와 있다. 그는 또 한 중국도시과학연구회 산하 디지털도시전문위원회 위원(부비서장 겸임)이기도 한 데 여기서는 그가 베이징정보기술연구소 소속이며 고급공정사라고 나와 있다.
국가정보기관에 심리전 부서가 창설된 것은 1967년으로 올라감.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은 67년 대선과 총선 이 후 기존에 분산되어 있던 반공 선전 및 체제 우위 관련 활동 등을 일원화 통괄하기 위하여 8국을 심리전국으로 신설.
8국(심리전국)
초대 국장 김기완(김재권) 당시 3국(국내 보안 정보국) 판단관 임명
김형욱은 여기에 대하여 회고록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음
본문의 내용에 따르면 중앙정보부 설립 당시의 조직을 6개국, 3개실로 기술하고 있으며 주요 인사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잇다.
차장(복수) 서정순 이영근, 2국장 석정선, 3국 고제훈, 서울분실장 이병희, 6국장 강창진, 감찰실장 권영길
그런데 조갑제의 박정희 중 중앙정보부 창설 부분을 다룬 부분에는 창설 당시 직제와 인원들이 본문과는 조금 다르게 나와 있다.
이 부분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정보부는 처음 4국 3실로 출발했다. 총무국(1국), 해외정보국(2국), 수사국(3국), 교육 발전국(5국) 그리고 통신실, 감찰실 및 비서실. 정보부를 창설한 육사8기출신 정보장교는 김종필(부장), 서정순(서정순·기획운영 차장), 이영근(행정관리 차장), 강창진(총무국장), 석정선(해외정보국장-뒤 에 정보차장보), 고제훈(수사국장), 최영택(교육발전국장-뒤에 주일 대표부참사관)등이었다. 이들은 수사에는 경험이 없었다" [박정희 생애] 제13부 내부균열 (1) 정보부 권력의 비대화 -- <389>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9022370237
"행정관리차장에 이영근, 기획운영차장에 서정순, 총무국장에 강창진, 해외 담당 제2국장에 석정선, 수사 담당 제3국장에 고제훈, 교육 담당 제5국장에 최영택, 통신실장에 김태진, 비서실장에 金奉成(김봉성), 고문에 신직수(법률담당)─장태화(정치담당)─김용태(경제담당)이었다." [박정희 생애] 제10부 혁명아의 24시 (33) -- (304)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8102170335
창설 시점 조직 61.5
부장
이를 보면 조직상 직제에서 복수의 차장을 둔 점이나 해외정보, 총무 부서 관련 기술은 양자가 일치하지만 국내 분야에서는 기술하는 데 조금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정보부 창설 초기에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았고 또 정치적 격변이나 분란이 잦은 탓에 초창기 기구 개편이 빈번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를 통한 과거 신문 검색은 이에 대한 확실한 답안을 보여주고 있다. (정보부 인사이동이 신문에 나는 일도 있었다!)
이를 보면 창설 당시에 5국이 교육발전국으로 있었고 따라서 내 무덤의 침을 뱉어라에 나온 기술이 보다 창설 당시의 조직을 정확하게 반영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또 한 창설된지 한 달도 못되어 최영택이 교육발전국장, 강창진이 총무국장에서 교체되었다는 것은 내부 인사나 조직이 그만큼 안정적이지 못하고 또 한 격변하는 정치적 상황과 외적 필요에 따라 유동적으로 움직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5국장 최영택의 경우 대일 막후 교섭의 임무를 띠고 주일 참사관으로 전보되어 한일 교섭의 막후 중개역을 맡았음. 참고 http://pdf.joinsmsn.com/article/pdf_article_prv.asp?id=DY01199710160055 ) 나아가 여기서 이 인사와 더불어 조직 개편이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3국은 국내 정보 수집을 5국은 대공수사를 담당하는 체제로 개편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특히 쿠데타 이 후 권력 유지를 위하여 정부 부처를 비롯한 국내 각 분야를 감시하고 여러 정책을 주도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필요에서 비롯한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개편이 위의 인사와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는 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61년 후반기 무렵까지는 양 부서가 국내업무를 분담한 체제를 갖추게된 것으로 여겨진다. 진실화해 위원회가 전 법무부 검찰국장 위청룡이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다가 61년 11월 사망한 사건을 조사한 보고서(참고)에서는 관련 조사 대상자인 당시 중앙정보부의 정보수집국장(전재구)과 주무 책임자인 수사국장(고제훈)의 진술을 기술하고 있다. 이는 각기 당시 3국장과 5국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 시기까지는 이러한 체제가 확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본문에 기술한 조직은 창설 당시가 아닌, 설립 조금 이 후 개편된 내용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창설 이후 개편 61. 말
부장
김종필
기획운영차장(실무 부서 담당)
서정순
행정관리차장(행정, 관리, 지원)
이영근
비서실장
김봉성
감찰실장
권영길
통신실장
김태진
1국(총무)
유철수
2국(전략정보)
석정선
3국(국내정보)
전재구 ~ 61 .11?
고제훈
5국(대공수사)
고제훈 ~ 61.11?
전재구? (6국 설립 이전까지)
6국(특별활동)
전재구
61년 말 창설?
특명수사 특히 정치 관계 수사를 담당한 6국(특별활동국)의 경우 설립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61년 말부터 62년 시점까지는 설치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박정희 생애] 제13부 내부균열 (8) -- <396>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9030770246
창설 초기의 이러한 조직 개편들은 국내 분야의 활동 소요를 반영한 것으로써 정보부가 군사정권을 유지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으며 또 한 국내 정치 및 정책 전반에 깊숙히 관여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태하, 어느 반역자의 고백, https://www.whoim.kr/detail.php?number=1071&thread=38r04r01, 정보부 권력의 비대화 (ibid.)
제2장 -전-노 11기의 63년 쿠데타 음모
2대 부장 김용순, 겨우 45일 재임에 끝나다
김재춘은 최고위원이면서 군경검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의장 주변에서 파워맨으로 통했고...구두 발령을 ....
이 건에 대해서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 보다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데 4대 의혹 사건이 불거지고 내부 투쟁이 격화되면서 혼란스러운 가운데 박정희가 김재춘을 중앙정보부장으로 구두발령을 냈다가 당시 정보부의 주축을 이루고 있던 8기생의 반발로 번복한 사정을 기술하고 있다.
[박정희 생애] 제13부 내부균열 (6) -- <394>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9030370362
[박정희 생애]내무덤에 침을 뱉어라 <395>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9032270329
당시 중정지부장 (마산에 사무실이 있었다)이었던 J가 그 사정을 말한다.
해당 중정 경남지부장 J는 전재구를 가리키는 걸로 보인다. 당시 그는 6국장으로 정치수사 및 국내 정보 수집을 담당하고 있다가 최고회의 내의 파벌 투쟁의 여파로 함경도 파를 달래기 위하여 경남지부장으로 좌천되었다. [박정희 생애]내무덤에 침을 뱉어라 <395>
취임 다음 날인 2월 23일 정보부차장, 국장, 지부장 등 8기생 중심의 JP계 간부 31명을 잘랐다.
당시 해임된 인사내역(원대복귀 포함)은 국,과장급 28명(지부장 포함), 검사 3명이며 신규 교체 인원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은 전직
차장
박원석 소장(공군참모차장)
1차장보(정보차장보)
김동배 준장(해군정보참모부장)
2차장보(보안차장보)
여운상(서울지검 부장검사)
기획통제관
김경옥 대령(최고회의재경위원회 보좌관)
1국장 (해외정보공작)
하태영 준장(군사정보부대 MIU 부대장)
2국장 (해외정보분석)
한무협 준장( 6군단 참모장)
3국장 (국내보안정보)
길전식 대령
5국장(대공수사/활동)
6국장(특명활동)
7국장 (총무)
김해영 대령(해병훈련단 참모장)
감찰실장 전재덕
비서실장
통신실장
관리국장 박창수
정보학교장 윤일균
보안국장 이상무 李相武 (임무는?) 참고
이는 62년 무렵 확대된 직제에 기반한 것으로써 이러한 기구 변화는 62년4월 무렵까지는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개정 중앙정보부법 공표) 여기서 특징으로는 종전의 해외 정보(대북 정보 포함)이 해외정보 수집.공작과 분석 분야가 분리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창설 당시에는 기획운영, 행정관리 2명의 차장을 두었으나 이 후 개편으로 한 명의 차장 하에 차장보를 두어 각기 해외와 국내를 분담하게 되었다. 해외 담당의 경우 정보차장보(제1차장보)가, 국내 분야의 경우 (국내)보안차장보(제2차장보)가 관장했다. 이 시점의 개편에 대해서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석정선 정보차장보 산하 정보분야의 3개국중 제1국은 정보수집, 제2국은 정보분석, 제3국은 통신정보의 임무를 담당했다. 오탁근 보안차장보 산하의 보안분야 3개국은 4자를 피해 제5국부터 제7국까지 명칭을 부여하고 각각 기획보안정보, 특수정보활동, 홍보심리전을 담당케했다" [박정희 생애] 제13부 내부균열 (1) 정보부 권력의 비대화 -- <389>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9022370237
*62년 초 개편 직제
부장
김종필
차장
서정순
비서실장
고재일
정해식
감찰실장
통신실장
관리관실장
정지원
정책연구실장
최영두
1차장보(해외정보)
석정선
2차장보(국내보안)
오탁근
1국(해외정보수집)
2국(해외정보분석)
윤일균
3국(국내정보)
고재훈?
5국(대공수사)
6국(특별활동)
전재구
7국(총무)
단 해당 기술에서 여전히 일부 시기 혼선이 보이는 데 7국이 홍보 심리전을 담당하는 부서가 된 것은 김형욱 부장 재임 시기이며 당시 7국은 총무국으로 여겨진다. 63년 전두환이 7국 인사과장을 맡았던 것도 당시 7국이 인사.총무 담당 부서라는 것을 입증해주고 있다.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page=1&C_IDX=5767&C_CC=AZ
그리고 8기가 아니더라도 JP와 친하다는 간부라면 내보내 남은 사람은...
책 앞 부분에서 기술된 것처럼 윤일균은 공군 정보국장을 지냈고 이 후 중앙정보부에 들어와서 62년 초 무렵석정선의 후임으로 2국장을 맡아 해외 정보 업무를 담당하며 김재춘 부임 시까지 재직하다가 이 후 정보학교장으로 전보되었다.
제목 : 한국 중앙정보부 김종필 부장의 미국방문
네 명의 한국관리들이 한국에서 왔다 : 김종필 자신; 중앙정보부의 제2국장 윤일권(Yun Il-kyun) 대령; 계획국장 조주원(Cho Chu-won) 대령; 김의 통역관으로 참가한 중앙정보부의 연락담당국장 김상인(Kim Sang-in) 대령 1962년 11월 2일
국무부 발송 항공서한 (윤일균이 윤일권으로 잘못 번역되어 있지만 이 무렵까지 그가 석정선 후임으로 2국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http://www.archives.go.kr/archivesdata/upFile/palgan/20070329150628495.pdf
제3장 -대통령의 칼, 김형욱 정보부
뚝심의 ‘돈까스’, 남산공화국 재편 ㆍ105
그리허여 구성된 실.국장급은 다음과 같다. 감찰실장 박승권 ...
이 내용은 기본적으로 김형욱의 회고록 혁명과 우상에 나온 내용을 바탕으로 기술되었으며 대체로 이 전 조직이 계속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여기서는 7국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의아스럽다. 이 전의 7국이 총무국이었는 데 여기서는 6국을 총무국이라고 하는 걸로 보아 개편되었거나 혹은 페지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다음 기사에서 김형욱 취임 이 후에도 7국이 여전히 존재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검수사국장 김세배 (전 5국장) 7국장 경력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4012200329201020&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4-01-22&officeId=00032&pageNo=1&printNo=5615&publishType=00020
부산지검 차장 이도환 7국장 역임 경력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3030100329204110&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3-03-01&officeId=00032&pageNo=4&printNo=8437&publishType=00020
또 한 김형욱 회고록에서도 자신이 67년 선거 이후 홍보.심리전 활동을 전담하는 8국을 설치했다고 기술하고 있어서 언급되지 않은 7국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다. 이렇게 여타의 부서와는 달리 7국의 존재를 밝히지 않은 데 대한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추정컨 데 이 7국이 과거 특명활동국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고 하면 회고록에서 이 후 정보부장을 지낸 이후락이 총무국이었던 6국을 특명수사국으로 바꾸어서 정치 탄압과 고문을 일삼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 데 자신의 부장 재임시에도 같은 부서가 있었다면 자가당착이 되기 때문에 이를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고 여겨진다.
이 7국은 심리전국 창설 이후 곧 폐지.개편(아마도 5국에 흡수)되고 대신 심리전국이 7국으로 개편되어 상당기간 이어지게 된다. 대개 중앙정보부를 다룬 자료나 회고에서 7국을 심리전국으로 기술하는 것은 여기서 비롯된다. 초대 8국/7국장으로 임명된 김기완은 국방부 정훈감 출신으로 군에서 심리전을 담당한 바 있다. 그 후 그는 나중에 주일공사로써 DJ 납치 사건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그 아들이 현 주한 미국 대사인 성 김이다. 이 후 이 심리전국은 70년대 중반 무렵까지 7국으로 알려졌고 업무 특성상 선전 문화 매체와도 관련이 깊어서 원로 문화인들 회고에 가끔씩 이와 관련된 언급이 등장하기도 한다. (참고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640399 )
감찰실장
방준모
통신실
1국(해외정보수집)
이철희 66 ~
2국(해외정보분석)
양해경 68 ~ 69
3국(국내보안정보)
전재구 64 ~ 69
5국(대공수사)
홍필용 64 ~ 68
6국(총무)
7국(심리전)
김기완 67 ~
외사정보국
관리국
윤보선 후보 당선되면 사살하라ㆍ114
김재춘이 그 집을 나서니 백태하 등 중정요원 들이 그를 미행했다
백태하는 육군 중령 출신으로 중앙정보부가 창설된 후 입사하여 제주,경기지부장, 서울 분실장, 6국장(총무)을 지냈다. 특히 서울 분실장 시절 경향 신문 탈취 공작에 깊이 관여하기도 하였다. 당시 경향신문은 반정부 논조가 강했고 공화당 창당 및 집권 과정에서 이탈한 김재춘 전 부장이 이를 인수하려고 시도하였다가 정보부에 의해 좌절되었다. (해당 부분에 대해서는 백태하 회고 https://www.whoim.kr/detail.php?number=3041&thread=38r04r01, 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928 참고)
윤칠용 방첩부대의 "테러충성"
윤필용씨가 오늘날 "많고 많은 반혁명 사건 중에서도...
이 원충연 사건을 밀고한 이 모 소령은 이상열이다. 그는 당시 1군 보안부대장으로 사건 모의에 가담하여 이를 녹음한 후 제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후 중정에 들어가서 나중에 파리 주재 공사가 되었다.국정원 과거사 조사에 따르면 그는 김형욱 사건 김형욱 유인 살해를 지휘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후 귀국하여 전주지부장과 해외공작국장을 역임하였다. 정보 일선에서 물러난 후 주 미얀마, 리비아, 이란대사를 지내면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추적특종] “김재규, 10·26 1년 전 박정희 시해 모의”1965년 ‘反혁명사건’ 관련자 접촉… 핵심 인물 급사로 물거품 월간 중앙 2005년 09월호 http://blog.daum.net/hanmailhan/2171914
김형욱, 반JP 칼을 뽑다ㆍ131
당시 3국장 C씨의 얘기를 들어본다.
이 3국장 C는 전재구이다. 그는 서울분실장으로 있다가 64년 6.3 사태 무렵 김영민의 후임으로 다시 3국장이 되어 YTP 사건 당시국내 정보 업무를 총괄하였다. YTP 사건 처리와 관련된 저간의 대화는 김형욱의 회고록에서 언급되고 있다. 다만 회고록의 관점이 자신의 무관함을 강조하고 있긴 하지만 C가 전재구라는 것은 여기에 명기되어 있다.
제4장 - 피 묻은 3선 개헌, 대가는 해임
후계 물망 JP 철저히 짓밟으라-복지회 사건ㆍ153
최영두가 중정 연구실장을 할 떄 송상남은 차장이었던 인연....
정책연구실은 중정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고 정보.수사 뿐 아니라 국가 정책 전반에 관여하게 되면서 창설되었다. 각종 분야별 전문가들을 모아서 각 분야발 사안을 연구하여 정부 기관에 제공하고 정책제안하는 싱크탱크적인 기능을 하였다. 이 정책연구실은 국내 보안 부서와 더불어 중정의 역할을 단적으로 보여주며 이 후 이러한 기능은 국내 사찰 감시 기능과 융합하여 정책 스크리닝.
모니터링 기능으로 유지되어 국정에 대한 동원 조정의 기반이 되었고 이는 한국적 정보기관의 한 특성으로써 계속 이어져 왔다.
창설 당시 정책연구실장은 최영두가 맡았고 강성원이 행정관으로 실무를 전담했다.
정보부 권력의 비대화 -- <389>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9022370237
권총 들고 관리한 군납이권의 행방ㆍ159
김형욱 부장은 이 무렵 전모 국장을 시켜 동아일보 간부들을 미행
본문에 언급된 전모 국장은 당시 3국장 전재구이다.이는 본문에서처럼 김형욱 회고록에 명기되어 있다. 전재구는 64년부터 69년 무렵까지 본부에서 3국장을 역임하며 국내 정보 전반 특히 정치 정보.공작을 관할하였다. 이 무렵 언론 담당 조정반이 설치되었고 이들은 각 신문사별로 담당요원을 지정하여 해당 언론사 내부 사정 수집 및 협조요청을 통한 기사 수정. 보도 중지 업무를 담당하였다.
김형욱 회고록,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31331.html
김형욱·이후락, 개헌의 희생양 되다ㆍ172
3선 개헌 국민투표를 며칠 앞둔 69년 9월 초순 3국장 전재구도 날아갔다. 후임은 김형욱이 그의 회고록에서 호평한 동향 출신 김영민이었다. 63년 대통령 선거 때 이미 3국장을 했던 인물이었다....
국내 정보 특히 정치를 담당하는 3국장은 선거 및 정치 공작의 주무 부서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김영민은 육군첩보부대 공작처장 출신으로 김형욱 부장 취임 이 후 3국장이 되어 63년 선거 관련 업무를 총괄했다. 이 후 64년 이철희의 후임으로 해외 정보 공작을 담당하는 1국장으로 전보되었고 전재구가 그 뒤를 이어 3국장으로 임명되었다. 김영민은 다시 3국장을 잠깐 지내다가 김계원 부장이 취임하자 정무식이 이 직책을 넘겨받았고 70년 후반에는 전재구가 다시 3국장을 맡아 대통령 선거를 담당하게 된다.
제6장 - 배꼽 아래 인격 있나? 궁정야화(宮井夜花)
DJ 돌연 후보로 ‘진산 후보’ 공작 물거품ㆍ252
김계원 부장은 즉각 69년 9월 이래 정치공작을 지휘해온 3국장 정무식을 바꾸었다...
본문에서 기술하듯 이와 관련된 인사 배치는 전적으로 71년 선거를 대비한 것으로 정치 담당 주무부서인 3국장에 노련한 전재구를 앉히고 국내 보안차장보에 강창성를 임명하여 국내 업무를 총괄케 하였다. 이들은 이후락 부장 부임 이후에도 계속 유임되어 71년 선거 때까지 계속 선거 대책을 담당했다. 전재구의 3국장 임명을 조언한 김동근 비서실장은 이 후 6국장을 거쳐 강창성의 후임으로 보안차장보에 임명되었다.
제7장 - 정치공작 사령부와 선거판 여우
정보부, ‘엄창록 선거전략’ 책 펴내ㆍ266
뒷날 중정 3국장이 된 C는 태완선의 노트를...
당시 엄창록 공작은 대선을 겨냥한 것으로 이 문제가 대비될 때 시점을 고려하면 이 C는 조일제로 여겨진다.
보안차장보를 지낸 K씨가 독후감...
엄창록 공작이 시작된 시기나 대선 관련성을 고려한다면 이 K는 71년 선거를 담당했던 강창성이나 그 후임이었던 김동근 중 한 명이 아닐까 추정된다.
제8장 - 이후락·김재규·윤필용의 충성경쟁
HR 정보부의 3김 운명 감정과 역학 점괘ㆍ292
김성락 국장을 시켜 운세감정을 은밀히 시도...
김성락은 당시 판단기획실장이었다. 그는 언론인 출신으로 합동통신과 연합통신에서 근무하였고 이 후 유정회 소속으로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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