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6/24 12:05

국가정보관 설치를 제안한다 야적장

전에 번역기 기반으로 날림본을 오렸는 데 우연히 국내 잡지에 이 글이 번역되었다는 걸 알고 이를 참고로 하여 지난 번의 미진한 부분이나 어색한 표현을 고쳐 새로 올립니다. (참고로 한 번역본은 월간 에머지 2001년12월호 개제문을 토대로 하였습니다. 사실상 무단 전제에 가깝지만 그나마 인명 조사는 제가 한 거니 어느 정도 번명의 여지가..)

전 일본의 외교관이자 전략가인 오카자키 히사히코岡崎久彦 전 태국 대사가 「Voice」2001년 10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본문에 나와 있듯이 이 오카자키 대사는 외무성에서도 주로 정보 분야에서 재직한 인물로 외무성 자료과장 분석과장 방위청 참사관(정보 담당)을 거쳐 외무성 기획조사부장 정보조사국장(현재는 국제정보국을 거쳐 국제정보통괄관으로 개편)을 역임한 바 있고 현재는 외교 안보 분야에 관한 사설 연구소인 오카자키 연구소를 설립하여 게속 외교 방위 문제를 연구하고 있고 부수 계열 대외 정책 관계 싱크탱크인 일본전략포럼에도 관여하고 있습니다 성향에서 보듯히 오카자키 역시 보수적 안보강화론자-특히 미일 동맹 강화에 있어서- 이고 일본의 안보 정책에 전략적 사고가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해 온 인물이며 최근 역사 문제에 관련하여 보수적 새역모의 일원으로 국내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하더군요. 그의 제안과 주장에는 이러한 배경이 깔려 있으며 국가강화라는 관점에서 정보력 강화를 논하고 있으니 어느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참고로 원본은 여기에 있으니 보고 싶으신 분들은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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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는, 내 생애의 관심사항이며, 언젠가는-현재 다루고 있는 근대 일본 정치 외교사가 일단락한 단계에서-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라고 여기고 있다. 이 일은 아직은 이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 데, 비록 일반 사람에게는 눈에 띄지 않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 최근 정보 관계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온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다 . 헤이세이 13년(2001년) 4월에 발표된 세계평화 연구소의「일본의 총합 전략 대강」은, 실질적으로는 나카소네 전 총리의 국가 전략론이지만, 그 내용 중 「내각 관방에, 각 성청을 비롯하여 내외의 정보를 일원적으로 집중시켜, 이를 기초로 내정 및 외교에 대한 국가 전략을 수립하기 위한 「내각 조사국」을 설치한다. 내각 조사국장관은 법제국 장관 급으로 한다」라는 제안이 있다. , 잡지 「諸君 제군!」은 헤이세이 13년 (2001년) 3월호부터, 나카니시 테루마사 中西輝政의 국가 정보론을 게재하고 있다.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제2차 대전을 중심으로 하는 영미의 정보 기관의 활동의 실체를, 나카니시의 전문분야인 국제 정치사의 관점으로부터 파악하고 있는 뛰어난 논문이다. 그리고, 역시 헤세이 13년(2001년)에 이르러, 외무성에서, 마츠오松尾 某씨에 의한 공전의 규모의 외교 기밀비 사기 사건이 발생했고, 이를 계기로 외교 기밀비를 본래의 목적인 정보 수집에 어떻게 집중적으로 이용해야할 것인가가 향후의 과제의 하나가 되있다. 이런 상황에서 , 내가 여태껏 생각하고 있던 것을 어떠한 형태로든지 발표하여, 세상의 의견을 듣는 것이 좋지 않을가 생각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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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이 것이 지금까지 글을 쓰는 것을 주저했던 이유이기도 하지만-지금부터 쓸 글은 내 개인의 경험과 감상에 의거한 바가 극히 크다고 하는 점이다. 내게는 정보 활동, 정보 조직이라는 것을 논한 문헌은 거의 없다. 외무성 내에 안내서와 같은 것은 있는 것 같다고 들은 적도 있지만, 그 텍스트는 가지고 있지 않다. 문헌을 이용하는 정공법은 아마, 나카니시 교수의 저작과 같이, 외교사에 있어서 미묘한 사안에 관계된 결정을 내릴 때 정보 기관이 관여한 실례를 모으는 데 효과가 있을 것이다.그 것은 그 것 자체로도 좋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것과, 향후의 일본의 정보 활동의 본연의 자세를 어떻게 하는가 하는 정책론, 조직론과의 사이에는 큰 갭이 있고, 따라서 이를 어떻게 메꾸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며 , 이렇게 되면 문헌보다는 실무경험이 의미를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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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묘한 경력을 갖고 있다. 외무성이라고 하는 곳은, 어학의 전문을 제외하고는 전문가를 육성하지 않는다. 지역국에 있었다고 생각하면, 경제국에 가게 되고 그리고 문화 홍보라든지 영사 사무를 하는 등 뭐든지 하게 한다. 상급직의 외교관에 대해서는 특정의 분야의 전문가를 만들지 않는다. 이 것은, 일본이 국제사회에 참가한 19 세기, 외교의 표본인 영국 외무성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 영국의 외교관에게는 대학에서 법률이나 경제가 아니고 역사나 고전(그리스, 라틴)을 배운 사람이 많고, 게다가, 스페셜리스트가 아니고, 제너럴리스트를 중요시하는 전통이 배경에 있다. 일본의 외무성도 대체로 같지만, 이것은 영국의 사상에 의거한다고 하는 것보다도, 인사가 맞아 떨어진 우연한 결과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 것은 그 역( 즉 오카자키 본인의 스페샬리스트적 보직 경력에 있어서도) 또 참일지도 모르고, 나의 경우 는, 완전히 우연이라고 생각하지만, 공무원 시대, 도쿄에 있어서의 직무는 정보 관계뿐이었다. 과장 시대는, 분석 과장, 조사 과장, 조사실장이었다.그 후 짧은 기간, 중근동 아프리카국 참사관을 맡았던 적이 있지만 , 지역국이라고 해도, 중동은 미국, 아시아와 달리, 일본에 있어서는 정책보다 정보 중심의 지역이다. 그 다음은, 방위청에서, 외무성 출신으로써는 최초로 방위국내의 조사 1과, 2과의 사무를 소장, 통솔하는 임무를 맡게 되어 냉전의 최절정기에 소련의 군사력을 중심으로 하는 군사정보의 분석에 종사했다. 그리고 방위청 근무 이후, 미국의 대학, 연구소를 돌아 다닌 뒤, 친정인 외무 본성에서 기획조사부장, 그리고 곧 이은 조직 개편으로, 초대 정보조사국장을 맡았다. 그 사이, 과장으로부터 국장까지 20년 가깝게, 미국의 CIA(중앙정보국), NSA(국가 안전 보장국), DIA(국방 정보국), INR(국무성 정보 조사국), 이스라엘의 모사드, 영국 독일의 정보 기관등과는 직업상 여러 번 접촉했다. 아마, 과장 이상의 직무의 인간으로-즉, 특수한 직종의 하사관 클래스의 사람을 제외하고-각국의 정보 기관과 이 정도 밀접하게 접촉한 인간은 지금까지도 없고, 앞로도, 위에서 말한 나의 특수한 경력으로부터 생각하면, 별로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따라서, 이 소론도, 나 개인의 경험이 중심이 되고, 마치 「니혼 게이자이 신분(日本經濟新聞)」의 「 나의 이력서」와 같이 되어 버리는 것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어리석은 일 일수도 있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오히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발언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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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 개인의 경험이라고 해도, 그것은 참회록과 같은 것이다. 내가 초대 분석 과장(취임 당시에는 자료 과장으로 불리고 있었다)이 된 것은 1966년, 36세 때의 여름이었다. 때마침 그 때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어, 백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외무성의 중국 전문가들이 차례차례로 정세 판단을 그릇치는 참상을 목격했다. 중국 공산당은, 소련 공산당과 달리, 혁명 의식에 불탄 동지들의 모임이며, 소련형의 권력 투쟁 따위는 있을 수 없다라고 마지막 무렵까지 믿고 있던 전문가도 마침내 침묵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시의 중국과장이, 「모택동은, 이제 우리가 존경하고 있던 위대한 모택동이 아니다」라고 내뱉 듯이 말하던 것이 기억난다. 그 것은, 중국 전문가에게 있어서는 시련의 시기였지만, 전문가 집단 속에, 젊은 과장으로서 뛰어든 나에게 있어서 행운의 스타트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일 중 문제에 대해서는, 그 누구나 한번 더 스타트 라인으로 돌아와 출발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66년, 67년으로 공부가 진행되어, 정세 판단에 별 잘못도 없고 순조롭게 보내면서, 꽤 자신도 붙었을 무렵, 68년이 되어, 정세 판단의 무서움과 나의 미숙함을, 이번에는 나 자신 스스로 체험하게 되었다.

당시의 국제 정치의 초점은 베트남 전쟁이었다. 67년을 통해서, 베트남에 파견된 미군이 50만에 이른 것을 보고, 나는 미국의 결의와 미군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68년 말의 베트남 구 정월에 해방 전선측이 총공격( 테트 대공세)을 펼쳤을 때는, 해방 전선측이 거기까지 몰렸다고 생각했다. 그 판단 그 자체는 올바랐다. 나중에 생각하면, 그 때까지 숨어 있던 해방 전선측이 일제히 표면에 나왔으니까, 미국측이 침착하게 진압하면 남 베트남내의 공산 분자 초멸의 찬스였다고 한다. 공산측으로서는, 나날이 강화되는 미국측의 증강을 보고, 흥하든 망하든지 승부하러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미국내의 정치정세였다. 국내의 반전 기운 앞에, 당시의 존슨 대통령은 이 기회를 포착하여 전쟁을 밀어 붙이려는 정치력을 이미 잃고 있었다.ジョンソン大統領はこの機会をとらえてもう一息戦争努力を続ける政治力をもたなかった? 2월말에 맥나마라 국방장관이 사임하고, 웨스트모어랜드 사령관은 소환되고 존슨 대통령은, 북폭의 부분적 정지와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다. 미국이 이긴다는 것이 베트남 전쟁의 대국의 추세라고 하는 데 있어 나의 판단의 완패였다.

다음의 실패는 체코 사건이다.

3월 31일의 존슨 대통령의 성명 직후, 4월 1일로부터, 체코스로바키아의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자유화의 행동강령을 제기하고 자유화를 진행시켰다. 6월에는 신문 검열을 폐지하고, 지식인들은 이른바 「2천어 선언」을 냈다. 이것이 「프라하의 봄」이다. 여기에 대해서, 소련·동구 제국은 다양한 압력을 가했지만, 체코측은, 8월3일의 브라티슬라바 회의에서 간신히 이 것을 견더냈다고 생각되었다. 온 세상의 평론, 매스컴은-빅터·조르저/더씨와 유고슬라비아의 한 신문을 제외하고는-자유의 승리를 칭송하여 이제 냉전의 시대는 가고, 동서 데탕트의 신시대가 도래했다고 노래했다. 프라하의 시민들은, 긴 여름밤을 지새우며, 가두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누구 할 것 없이 서로 포옹하며 자유를 구가했다고 한다. 그것이 8월 20일에는, 20만의 바르샤바 조약 기구군의 침입에 의해 끔찍하게도 유린당해 그 앞으로 20년간, 다시 공산당의 전제 아래에 갇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번 봄부터 여름에 걸치고, 분석과의 분석은, 동서 데탕트의 움직임을, 세계의 불가역적인 추세라고 하는 생각으로 일관해 왔다. 이 것은, 앞서 말한 두 개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세계의 모든 논조, 그리고 일본의 논조와 백 퍼센트로 같은 판단이었지만, 그런 일과는 관계없이, 나의 판단의 완전한 패배였다.

이 두 개의 교훈을 얻은 뒤로는 , 별로 실패도 없었다.그 사이 기억한 정세 판단의 노하우에 대해서는 「국가와 정보」제1장(문예춘추), 「정보·전략론 노트」제1장(PHP 연구소)에 말하고 있으므로 참조 해주시길 바라다. 그런데 , 외무성의 과장 시대의 근무가 끝난 뒤의 워싱턴 재근중에, 직무상의 본무는 아니었지만, 대실패를 범하게 된다.

실은, 더이상 그 무렵의 나라면 범하지 않아도 될 실패였던 것이지만, 몇 개의 불운이 겹쳤다. 나는 71년 2월 부임 후, 4개월 정도 (대사관의) 경제반의 차석을 맡았다. 그 사이, 경제의 업무를 배우는 데 전념하여 정보 관계의 구면인사들과의 접촉은 자제해 왔다. 6월말, 문화 홍보의 담당이 된 날, INR 분석 과장 시대 이래로 구면이었던 홀드리치 보좌관을 예방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백악관을 방문했다. 그 때 홀드리치는, 심각한 얼굴로, 「지금부터 중대한 여행을 떠난다.그 목적은 닉슨이 캔자스 시티시에서 행한 연설대로지만, 오랜 친구는 결코 버리지 않는다」라고 말했다.이것이, 키신저 극비 방중의 예고였다.

당시 , 나는 단순히 경의를 뜻하기 위한 방문한 것이었다 . 홀드리치는 언제나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이며, 당분간 만나지 않았기기 때문에, 그 날은 특별히 심각한 표정을 지었는 지 어떘는 지 판단도 들지 않았다. 벌써 어떤 정보에 관심을 가져도 괜찮은 입장이었지만, 본래는 정무반의 임무로, 취임 당일의 내가 나설 무대도 아니다고 하는 상식적인 판단도 있었다.「오랜 친구」란 당시 많이 논의되고 있던 남 베트남 정부라고 생각했다. 캔자스 시티 연설도, 정보문화반(당시 공보 업무는 정보 문화반의 소관)의 수중에는 없었다. 중국 방문의 발표 후, 번뜩 생각해 내 읽어 보니, 분명히 그렇게 써 있다. 만약 그 때에, 적어도 한달 전부터, 핑퐁 외교 이래의 미 중 관계의 궤적이 머리에 들어가 있었다면, 혹은, 곧바로 캔자스 시티 연설을 구하여 그 행간을 읽으려는 긴장감이 있으면--그것은 한달이 경과하면 나의 일과가 되어 있었다-키신저 극비의 방중은, 7월 15일의 이른바 닉슨·쇼크의 2주일전에 사토 총리에게 예고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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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나머지는, 판단의 잘못으로 가슴을 쓰라리게 되었던 기억은 없었다. 78년부터 81년까지, 78년의 소련 지상군의 북방 영토 진출, 79년의 중 월 전쟁, 연말의 소련에 의한 아프간 침공, 소련 해군의 극동 증강, 캄란 만 진출 등 긴장이 잇따른 사이, 방위청의 정보 담당의 총괄로서 국회에서도 3백회의 답변을 했지만, 말꼬리를 잡혔던 적은 몰라도, 정세 판단의 잘못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그 후, 82년부터 84년까지, 지금의 국제 정보국에 해당하는 부국의 장을 했지만, 국제 정세가 중동 이외는 평온하던 시기이기도 해서, 그 때도 판단의 잘못은 없었다. 과거 20년간, 국제 정세가 가장 격동했던 시기였던 89~91년(베를린 장벽 붕괴, 걸프 전쟁, 소련 해체에 걸쳤다.)그 당시 나는 재외의 대사를 하고 있었지만, 더이상 판단의 잘못은 없었다.

자랑인 듯한다고 하는 비판은 각오한 바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데 필요한 바 예시로서 그 당시의 일을 써 둔다.
89년의 베를린 장벽에 이르는 소련권붕괴는, 88년에 예상해 두었다. 당시의 무라타村田 차관에게 보고해, 성내 간부회의 기록에도 남아 있다. 당시의 아베安倍 (아베 신타로 전 외무대신. 자민당 간사장 역임. 아베 신죠의 아버지) 자민당 간사장에게도 설명했지만, 89년의 봄이 되고, 「자네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대로 이야기하고 다녔는 데, 동구에서 아무것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라는 말을 들어, 빗나간 게 아닌가 하고 조금 걱정이 되기도 헀었다. 하지만, 여름 경부터는 동구 제국이 일제히 무너지고 연말에 베를린 장벽 붕괴에 이른다. 당시의 정부 발언도 신문도 「어느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사태」라고 하고 있었지만,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보이고 있던 사태였다. 90년의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의 전날에는, 방콕에서 나카야마(中山太郞) 외상을 맞이하고 있었다. 신문밖에 정보는 없지만, 분명하게 전쟁은 임박하고 있다. 이라크는 쿠웨이트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고 있다. 군대는 국경에 집결하고 있다고 한다. 한 여름에 물도 응달도 없는 국경에 기동부대가 집결하고 있는 이상, 가까운 시일내에에 움직임이 없으면 안 된다. 혹은, 타이 정부에는 미국으로부터 경고가 오고 있지만, 외유중인 일본의 외상은 모를 지도 몰랐다. 거기서, 그날 밤 외상 만찬회 전에 쿠웨이트 정세를 브리핑 해 두었다. 실은 나중에 들은 바로는, 미국은 현지 대사의 낙관적인 보고를 믿어 거기까지 예상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음날, 나카야마 외상이 라오스의 Vientiane에서 1박하던 중 침공이 있어, 외상은 비행장으로부터 직접 대사 공저에 와서 일본으로서의 사후책을 상담했다. 사변 직후의 3일간의 일본의 초동대책은 지금도 칭찬할 만한 것이있다.

8월말에는 휴가로 귀경하고 있었지만, 그 당시부터 연말까지-이것은, 거의 일본내서만이라고 해도 좋은 기이한 현상이지만-반년간에 걸친 논쟁은 미군이 개입할지 여부였다. 상당히 양식이 있는 사람조차도 「미군의 무력 개입을 예상하거나, 혹은 기대하는 것과 같은 언동은 일본국 헌법의 평화주의에 반한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후에 총리가 된 모 정치가는, 「자네는 그렇게 말해고 있지만, 미국이 개입하면 석유가 올라 세계경제가 엉망진창이 된다」라고 했다. 석유의 가격이 오르기 때문에 침략을 배제할 수 없다고 하는 것 자체, 원래 이상한 논리이지만, 나는 이라크가 멀리 사우디아라비아의 대유전을 파괴하는 능력이 없는 것을 판별하고 있었으므로, 「미군 개입 후, 석유가격은 당분간 상승합니다만, 빨리 원래대로 돌아가므로 별다른 영향은 없을 겁니다」라고 해 두었다 .이것은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 정확하게 맞았다. 방콕으로 귀임 후는 직접적인 정보도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외로움을 타는 미국이 혼자서 전쟁할 리도 없다고 생각하고, 영국 대사를 만날 때 마다 영 기갑사단의 동정을 묻기로 했다. 일찌기 롬멜군을 물리친 영 최강의 사단 「사막의 쥐」는 라인 강변에 있었지만, 89년의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밖으로 움직일 수 있을 여유가 생겼다. 라인을 떠난 사단은 지브롤타와 수에즈를 지나 홍해기슭으로부터 상륙해, 도착은 11월 초순, 11월 중반경에 전개를 종료했다. 그리고, 11월말에는 이라크에 대한 최후통첩, 그것을 소련의 중개로 반 달이 더 늘어난 기한 마감인 1월 중반에, 시계와 같이 정확하게, 미국측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보이게 되었어도, 맞는데는 우연한 요소가 있어, 혹시 무엇인가를 간과하고 있어 대실수를 할지도 모른다고 하는 의구심은 언제나 안고 있었다. 이 의구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늘 바라던 바었다. 92년에 퇴직하고, 매일, 매주, 매월, 빠뜨리지 않고 국제 정세를 관찰하기로 하고 나서, 어느덧 이 것이 10년이 되었다. 매월, 민간회사의 조사 부장 클래스를 상대로 정세 판단을 행하는 모임을 개최하고 있고, 칸사이에서는 사장, 회장 클래스 상대에게 2개월에 한 번 두 개의 모임를 개최하고 있지만, 전망을 잘못했던 적은 없고,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것이 일어난 적도 없다. 평화로운 시대가 계속 된 탓도 있지만, 외무성의 과장 이래 30년 이상을 거치고, 정세 판단에 아무래도 자신감 같은 것이 나와 있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이 노하우를 사장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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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전망이 맞게 된 것일까.

물론, 정세를 중단되지 않게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 제일이다. 외교관으로서 실무를 하고 있으면, 예를 들어 총리의 방문등이 있으면 그 준비로 일주일간 정도는 그 일 이외의 국제 정세 등 볼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그 사이, 중러의 정상회담등이 있고, 공동 성명이나 주요 연설의 텍스트등을 읽어아겠다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후의 일에 쫓겨 간과해 버리기도 한다.

특히 미국의 공청회의 기록이나 요인의 스피치 등, 차분히 앉아서 읽어야 하는 것인 데도 못 읽고 마는 경우가 많다 .그것을 계속해 읽는 것만으로, 정세 판단의 기초가 아주 달라진다. 공청회의 기록이라고 하는 것도, 처음은, 어디를 읽어도 좋은가도 모르지만, 축적을 할 수 있게 되면, 특히 주목 해야할 곳이, 저절로 보여진다. 어쨌든, 빠뜨리지 않고 계속적으로 읽는 것이 기본이다. 이렇게 하고 실력이 따라 오면, 나머지는 상승적으로 정세 판단의 질이 향상해 온다.
프라하의 봄의 실패에서 기억한 것은, 매스컴이나 평론의 99%까지가, 데탕트다, 데탕트라고 떠들어도, 그것은 국제 정세의 진정한 흐름이란 아무 관계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 것은 나의 능력의 함수이기도 하다. 신출내기로 겨우 정보 맨의 한 명이 되었을 무렵에는, 역시 선배의 전문가가 말하는 것에 그만한 도리가 있다고 생각해 버린다. 아니, 모두가 말하는 것은 이상하다, 라고 생각하게 되려면 , 상당히 실력을 붙여 스스로의 견식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여론이 기뻐하는 정보에는 경계해야 한다.전쟁중에는, 전쟁이 잘 된다고 할 전망, 평화시는, 모두가 평화를 사랑해, 평화는 계속 된다, 라고 하는 전망은 몇번이나 속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배웠다. 그러던 중, 걸프 전쟁 무렵은 남들이 싫어하는 것을 태연하게 말할 수 되어 있었다. 90년의 연말, 고 우시바 牛場 (牛場信彦) 대사의 칠주기의 연회에서 내가 「1월에는 미군이 개입할 겁니다」라고말하자, 고 기우치 노부다네木内信胤씨가, 무서운 얼굴을 하고, 「그것은 외무성의 견해인가?」라고 따졌다. 내가 「외무성에서는 나 밖에 그런 것을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라고 하자,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과연 큰 인물, 「또 우시바牛場가 좋아할 것 같은 사람이이 여기에도 있는 거군!」하며 파안 일소되었다. 대장성 출신의 스미타 사토시 澄田智 씨(전 일은총재)도 동석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으면 증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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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런 일보다, 전망이 맞게 된 최대의 원인은, 미국의 중요성을 알 수 있던 것에 있다. 그 것은 일본의, 혹은 미국과 영국 이외의 세계의 모든 정보 기관의 문제이기도 했다. 내가 과장을 하고 있었던 시대까지는, 정보라고 하면 공산권 정보였다. 소련, 중국, 북한, 북 베트남과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동정이 주요 관심사였다. 장문이고 난해한 공산당의 문장을 정독해, 그것을 읽어 푸는 것, 그것을 공산당 내부로부터 새어 전해져 오는 정보와 조합, 정밀 조사 하는 것, 그것이 정보 사무였다. 특히, 56년즈음부터 시작된 중 소 논쟁이 되면, 양쪽 모두 장문 난해한 언설의 교환이며, 그 진심이 어 디에 있는지를 추측하는데는 고도의 지적 훈련이 필요했다.중소 논쟁을 다루었다고 하는 것만으로, 벌써 남 못지 않은 정보 맨이라고 할 수 있었던 시대였다

당시는 소련 정치의 연구의 전성기이며, 도이처, 조르쟈 등의 쟁쟁한 전문가가 분석을 서로 경쟁했던 시기엿다.일본 내에서도, 당시 가와지마 히로모리 川島広守(*경찰 관료. 당시 내각조사실장. 경찰청 경비국장 경무국장을 역임하고 내조사실장 임명. 이 후 내각관방부장관 역임. 일본 프로야구 커미셔너를 거쳐 현재는 J 리그 커미셔너로 재직 또한 내각정보조사실의 외각단체인 내외정세조사회 이사 .53年公安部長、67年警備局長、70年警務局長、71年内閣官房内閣調査室長を歴任。73年に第2次田中内閣の官房副長官、76年に日本鉄道建設公団副総裁として転出、79年には同総裁に。同年10月に退職し、84年11月セ・リーグ会長に就任。98年にコミッショナーに就任した。)
 )씨가 있던 내각 조사실, 스가누마 미츠히로 菅沼光弘(전 공안조사청 조사2부장. 현 아시아 사회개발협회 회장 )씨가 있던 공안 조사청, 나카지마 지로 中島二郎(경찰관료. 당시 경찰청 외사과장. 그후 경비국 참사관 등을 거쳐 경시청 부총감 역임. 현 후지 급행 사 특별고문) 씨가 있던 경찰청, 민간 연구소에서는 고야 에쓰오 甲谷悦雄(전 대본영15과 (전쟁지도) 과장, 전 후 공안조사청에 들어가서 자료과장 총무과장. 참사관을 역임. 은퇴후 사설 연구소인 KDD 연구소를 설립. 대공산권 관계 연구 정보 분석 활동에 노력)씨, 도이 아키오土居明夫 ( 전 육군 중장. 참모본부 러시아 과장 역임한 구 군내 소련 통. 전 후에는 대륙문제 연구소를 설립하여 소련 중국 관계 정보 분석 연구 활동 전개 )
씨 등이 분석을 서로 경쟁했다. 가르침을 받은 것은, 모두의 주요 관심사가 공산권 정보였기 때문이다. 나도, 부임 후 조속히 읽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 Lenin 전집, 모택동 선집, 중소 논쟁집이었다. 따라서, 68년의 테트 공세 때도, 분석의 중심은, 북 베트남의 노동당의 공식 문서로부터 그 전략, 전술을 읽는 것으로 그 배후 중 소의 대 베트남 정책이었다. 지금에서생각하면, 이것으로 베트남 전쟁의 귀추를 알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공산권 전문가 등은 잘난듯 한 말을 말하고 있지만, 정말로 어려운 것은 미국의 정치를 읽는 것이다」

이것이 1971년의 닉슨·쇼크시의 우시바牛場 (주미)대사의 말이다.

지금이 되서는 이것이 상식이지만, 이 것이야말로 이십세기 국제 정치의 맹점이었다. 생각해 보면, 최강국 미국의 동정을 아는 것이, 즉 세계의 동정을 아는 것이다. 별로 좋은 비유는 아니지만, 그 밖에 적절한 것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굳이 말하자면, 미국을 도쿄라고 하면, EU는 오사카, 일본은 나고야 정도일까. 나고야는, 도쿄의 나가다쵸, 가스미가세키, 마루노우치의 동향을 언제나 보고 있으면 대국을 오인할 것은 없다. 나고야와 오사카의 관계등의 우선도는 극히 낮다. 오사카를 본다고 해도, 오사카는 오사카에서 도쿄만 보고 있으니까, 도쿄는 오사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오사카는 도쿄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를 아는 편이 소중하다.

1988년에 내가 다음 해의 동구 혁명을 예언 할 수 있던 것은, 오로지 키신저, 비아라ビアラ등과 의견을 교환 하고 있었기 때문에이다. 동구 제국은 어디든 밖에 말할 수 없는 문제를 떠안아 위기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소련, 프랑스 등은, 만약 독일이 다시 통일하면 어떤 위협이 되는지, 그 브레이크로서 통일에 어떤 조건을 붙여야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담 상대는 결국은 미국밖에 없다. 상담의 과정에서는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것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해 미국은 모든 정보를 갖고 있게 된다. 일본 등에는 아무도 상담하지 않고, 내정을 털어 놓을 필요도 없기 때문에, 일본의 정부, 매스컴이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라고 한 것은 당연하다.

베트남 전쟁도, 북 베트남이나 중 소의 동향을 보는 것보다도, 미국 중심으로 전쟁의 형편을 보고 있으면, 68년 3월의 실패는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일본 뿐만이 아니라, 이십세기를 통해서 모든 구대륙 제국이 이 점을 놓치고 있다. 드골은 일찌기, 미국은 천하의 대사에 있어「유치한 감정(이상주의)과 복잡한 국내 사정(의회와의 관계등 )을 반영하는 나라다」라고 잘라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많든 적든, 구세계의 지도자의 대미관이며, 미국에 대해서도 배우려는 자세가 없었다. 누구나 미국에 대한 잡감은 가지고 있었다.그러나, 그것을 정보 분석이라고 하는 차원에까지 연구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물론, 미국에도 책임이 있다.윌슨 주의를 부상시켜 기존의 국제 질서를 파괴하고 그 책임도 지지 않고, 이번은 고립주의로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일을 하기 때문에, 외부의 사람은 미국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쓴웃음이랄까 냉소하고는, 그 그늘에 있는 터무니없는 잠재적인 힘이 보이지 않게 되어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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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미국 정보를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이야말로, 일본의 정보 기관에 있어서는 완전히 미지의 분야였다. 공산권 분석과 달라 선인의 연구가 있는 것은 아니다.공산권 분석의 수법을 적용시켜 봐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공산권 분석은, 한정된 정보 속으로부터, 숨겨진 진실을 읽어내는 기술이다.그러나 미국의 경우는, 정보는 범람하고 있고 전부 대충 훑어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의 양이라서, 그 안으로부터 진정한 정보를 추출하는 작업이다.공산권의 경우와 완전히 다른 방법론이 필요하다.

1968년 이후 내가 해 온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행 착오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좋다. 시행 착오라기 보다는, 미국에 대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능력이 허락하는 한 읽고 아직 그 밖에도 탐독해야 할 정보가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불안감에 항상 사로잡히면서, 겨우 그때마다의 정세 판단을, 결과적으로 별 탈 없이 해 왔다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하면서, 내가 배워 온 것을 말씀드리면, 우선, 미국이라는 것은 없다アメリカなるものはない고, 하는 것이다.

지금도 미국을 알고 있다고 칭하는 사람들의 입으로부터, 「미국은 진심으로 대만을 지킬 생각은 없다」라고「미국은 일본이 강대하게 되는 것을 내심 무서워하고 있다」라는 발언을 듣는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은 미국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을 말하고 있는 미국인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생각의 사람도 많이 있다.의회, 행정부, 매스컴, 여론, 각각 다르고, 각각의 그 중에서도 다종다양의 의사가 있다.그것이 서로의 체크·앤드·밸런스를 통해서, 이윽고 정부의 정책에 반영되게 되지만, 그것이 또 언제 바뀔지 모른다.「미국」의 의사 같은 것 등은 어디에도 없다. 단지, 그 다종 다양한 흐름을 항상 쫓고, 그 귀추를 판별할 수 밖에 없다. 미국의 정보에만 의지하면 정보 조작될 우려가 있다」라고 하는 사람이 자주 있지만, 이것도 「미국 이라는 것」이 있고, 뒤에서 일본을 조종하려 하고 있다고 하는 오해로부터 온다. 미국 발의 정보원은 결코 하나는 아니고 백명백양의 해석을 통해 전해져 온다.

그렇다고 하면, 어떻게 그 흐름을 쫓는가 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정부의 입장으로서 공표된 문서, 즉 대통령, 국무장관의 연설, 혹은 국방 보고 등이 중요하다.「염불만 늘어 놓고 있는 일본의 시정 방침 연설 등에 익숙해져 있으면, 무심코 그 중요성을 간과하기 쉽상이지만, 그러한 공식 문서를 정독해 그 속에 담긴 뜻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그리고, 전단계로서 의회에 있어서의 대일 정책, 대극동 정책에 관한 공청회의 기록을 정독하는 것이다.

그 전의 단계로 가면,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트」의 사설, 거기에 게재된 각종 논설, 「포린·어피어즈」등의 각종 논문을 읽고, 전문가, 지식층의 사이의 생각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과 병행하여 소중한 것은, 이렇게 해 얻은 소견을 부딪쳐 보고 반응을 알게 해 줄 대화의 상대를 미국의 요인, 식자 중에서 얻는 것이다.한층 더 바라자면, 대통령의 연설에 관여한 사람들로부터, 어디가 연설의 특색인지를 배우는 것이다どこが演説のミソかを教えてもらうことである. 키신저의 극비 방중 등, 몇 년간 만나지 않았던 홀드릿지가 그 만큼 가르쳐 주었을 정도니까 , 만약 옛 교분을 살려 수개월이 지난 뒤였다라면, 더 힌트를 주었을 것이다.

이 것은, 나의 실력의 함수이기도 하다. 나의 견식이 성장하면 할수록, 상대의 응답도 내용이 있는 것이 된다. 그리고, 나에 대한 미국의 유식자의 평가가 높아지면 질 수록, 진정한 실력자와도 만날 수 있고, 이야기의 내용도 고도의 것이 된다. 미국에 대한 정세 판단의 능력은 분석자의 대외적 평가와 비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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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나는 외무 본성에사 나와 대사로서 사우디아라비아와 타이에 재근하였고, 92년 이래 하쿠호도博報堂 (일본의 대형 광고 대행 홍보기획 회사)의 고문이 되어, 연구소를 주재 했다. 여기서 나는 년간의 꿈을 하나 달성할 수 있었다.그것은, 먼저 말한 것처럼, 중단되는 일 없이 국제 정세를 쫓는 것이다. 나는 외무성 근무 시대, 예외적인 혜택을 받은 조건에서 국제 정세의 흐름을 쫓을 수 있었다. 정보 분석과 관계가 없는 실무의 안건 처리에 쫓기는 직책에는 거의 종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우디아라비아와 타이에 있던 8년간은, 큰 뉴스는 신문에서 쫓을 수 있었지만, 정세의 흐름의 세세한 바까지는 아는 입장은 아니었다.지금도 예를 들어 전의 부시 시대의 베이커 국무장관은 어떤 사람이었는지라고 질문받으면, 나의 지식은 완전히 공백이다. 중요한 사건을 신문에서 쫓고 있는 것 만으로는 그런 일까지 알 수 없다.

이것은 모든 외교관에 있어서의 고민이다. 본성에서는 차관과 외무 심의관, 국제 정보국장, 재외에서는 주미대사 정도는 국제 정세를 전부 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임기의 동안 뿐이다.무엇인가 물어도 「내가 있었을 때는……」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특별히 혜택을 받은 사람으로, 외무 심의관, 차관, 주미대사 등 중추 포스트를 역임해도, 그 사이 7, 8년의 일 밖에 모른다.

한반도 문제로 말하면, 과거 7, 8년을 알고 있는 사람은, 94년 당시의 위기일발의 시기부터, 98년의 페리·프로세스, 2000년의 남북 정상회담에 이르는 도정도, 분위기도 알고 있다.그러나, 그 전의 88년 이후의 노태우의 시대, 91년의 냉전 종료시의 남북 동시 유엔 가맹의 시대는 모른다. 더 바라자면, 박정희 시대를 엿보지 않으면 현재의 한국의 이해에는 모자라는 점이 있다 나는 이 10년간만은 쉬지 않고 봐 왔다. 이 10년이라고 하면, 냉전이 끝나 처음의 10년간이다.그 전의 8년간의 대사 시대의 말하자면 정보의 틈새의 공백은, 지금까지도 느끼는 것은 있지만, 그것도 이 10년간에 필요를 느껴 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조사하야만 했었던 것에 의하여 , 조금씩 공백이 채워져 왔다. 이것이 모아지면, 과거 이 십수년 연속해 봐 온 것이 된다. 앞으로 몇 년 계속될지 모르지만, 정세 판단을 뜻하는 사람으로서 우선, 이상의 환경을 만들 수 있었다고 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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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고 나 나름대로 구축해 온 노하우를, 나 혼자 가지고 있지 말고, 조직으로서 남기고 싶다고 하는 것이 나의 희망이다. 정보의 조직론이라고 하면, 누구라도, 007과 같은 스파이 조직, NSA와 같은 전자 정보 조직, 그리고 그 정보원이 되는 스파이 위성등을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모든 조직의 피라미드의 정점, 즉, CIA의 간부가, 아무래도 대통령으로 하여금 국제 정세 판단을 오도케 하지는 않는지, 라고 하는 점에 집약된다. 이 조직에 궁리가 없으면 스파이 위성이나 전자 정보등의 정보를 아무리 쌓아 올려도, 최종판단이, 편견이나 희망적 관측, 개인의 조건등에로 굽어져 버려서는, 지금까지의 노력이 무의미하게 되어 버린다. 대국적 판단을 잘못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정보 시스템이 가장 필요한가, 라고 하는 문제점을 좁히기 위해서, 한번 더 쇼와사에 거슬러가서, 만약 그 때에 정확한 정세 판단하에서 정책을 행하고 있었다면라고 하는 케이스를 씻어洗って 다시 생각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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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사를 거슬러 올라가, 만약 올바른 정보를 지도부가 가지고 있었다면, 이라고 생각하는 예는 적지 않다. 종전의 해의 4월,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郎는 조각에 있어 도고 시게노리를 외상으로 하려고 했다. 토고는 「전쟁은 향후 1년간 계속하는 일도 불가능이라고 판단하지만, 총리가 앞으로 2, 3년이라고 갈 것이라고 하는 이상은 일치 협력은 곤란하다」라고 사양해, 스즈키는 「전쟁의 전망은 당신의 생각대로 맺어질 것이다」라고 언질을 주고 있다. 이것이 이윽고 포츠담 선언 수락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외교와 내정과의 최대의 차이는, 외교에는 상대가 있는 것이다. 내정이라면 대개는 일본의 국가 권력으로 좌우할 수 있지만, 외교의 경우, 일본의 정책이나 소망이 어떻게든지간에, 사물은 객관적 정보의 폭 속에서 밖에 움직이지 않는다.여기서 정세 판단의 중요성이 나오는 것이다.

도고의 전망은 상식적이다. 필리핀을 적이 제압하고, 남방에서 오고있고 오는 유조선등이 전부 가라앉는 상황에서 전쟁이 계속될 리도 없다 .만약 그 무렵, 일본 정부내에 정보 분석에 대해 아무도 무시 할 수 없는 듯한 권위가 있는 부문이 있어, 객관적, 의식적인 정세 판단, 즉 일본은 어떻게도 이길 수 있지 않아요라고 매일, 매주 계속 말할 수 있는 조직이 되있으면, 원폭과 소련의 참전을 기다리지 않고 항복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후도, 일본은 소련을 개입시킨 평화 공작에 마지막 소망을 걸었지만, 그것은 완전히 성과가 없는 노력으로, 패전의 시기를 늦추는 효과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소련 참전의 얄타 밀약은, 트루먼마저, 로즈벨트의 사후, 대통령을 계승했을 때 금고 속에서 발견하고 아연실색 했다고 할 정도의 고도의 기밀로, 그것을 몰랐다고 해 단죄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단지 얄타 회담 뒤 스웨덴 대사관으로부터, 오노데라小野寺 무관이 가지고 있는 정보통으로부터의 「소련은 독일이 항복한 뒤 삼개월을 준비 기간으로서 대일 참전한다」라고 하는 극히 정확한 정보가 도쿄에 전해졌었지만, 도쿄에서는 완전히 무시되었다고 한다. 이 것도, 만약 대소 외교에 희망을 건다면, 거기에 관한 정보는 대소경중을 따지지 않고 정리, 검토해야 하는데, 그것을 행하는 정보 조직이 되어 있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 전부터, 오노데라 무관은, 히틀러가 영 본토 상륙을 포기하고 대소전을 준비해 있다고 하는 정보를 계속 보내 41년 4월의 마츠오카 외상 유럽 방문 때의 회의에서 그것을 주장하고 있지만, 이것도 무시되고 있다. 당시는, 마츠오카 외상도 군부도, 소련을 일독 측에 끌어 들여 세계 전략을 구축할 생각이었다 . 그러면, 거기에 반하는 정보를 가능한 한 모아 분석해야 하는데, 반대로, 자신의 생각이나 적당한 정보만을 존중한다고 하는 기본적인 미스를 범하고 있다.조 직론으로부터 말하면, 복수 정보를 존중하는 시스템이 없었던 것이다.

개전시에 있어 내가 통한으로 생각하는 것은, 미국의 국내 정세의 분석이 없었던 것, 혹은 있었다 해도 그것이 지도부의 판단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은 것이다. 당시 로즈벨트는, 이런 저런 수단으로 여론을 유도해 미국을 전쟁에 참가시키려고 하고 있었지만, 의회의 압도적 다수는 거기에 반대하는 고립주의였다. 고립주의의 지도자 해밀튼·피쉬는, 진주만 공격 후 솔선해 로즈벨트의 전쟁 노력을 지지했지만, 추후 헐·노트의 존재를 알고, 이 「수치스러운 최후통첩恥ずべき最後通牒」을 몰랐던 것을 후회하고 있다. 미국의 싸움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도 베트남 전쟁에서도, 전쟁의 상대측과 국내 여론의 양쪽 모두에 대한 2 정면 작전이다. 진주만 기습으로, 이러한 2 정면을 하나로 정리하게 하는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지 않고, 헐·노트를 공표하고, 시간 기한부로 석유 수출입 금지의 해제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으로 전쟁을 시작하는 아이디어가 어째서 아래로부터 나오지 않았는지 . 그렇게 했으면, 미국이 이오지마에서 2만여의 해병 대원을 잃었을 때에, 일본 본토가 폐허로 화하기 전에 정전이 되었으리라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즉, 세계 최강력인 나라인 미국에 대한 분석이 너무 조잡하였다는 것이다.무엇보다, 이 미국 정보의 무시는, 이미 기술한 것처럼, 온 세상의 정치가, 정세 분석가의 오랜 세월의 통폐이며, 당시의 일본인을 탓하는 것보다, 이 교훈을 향후에 살리는 것을 생각하는 편이 중요하다.

중일 전쟁의 시작인 노구교사건 이전에, 중국 전 국토의 항일 의식이 타올라, 기회 있으면 일본을 전쟁에 말려 들게 하려는 분위기였던 것은, 아주 일부의 전문가 이외는 깨닫지 못했다. 그 것을 알 수 있었으면, 우선 외교적으로 해야 할것은, 서안 사건 후, 공산당의 포로가 되고 있는 장개석을 도와, 한번 더 반공 전선으로 되돌리도록 노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변 발발 후는, 참모본부의 호리바 堀場 전략 대로, 전쟁 불확대를 끝까찌 관철하든지, 대군력 집중의 작전을 행할까의 양자택일이 되었을 것이다. 만약 출병했다고 해도, 「응징 운운」이라고 해 병력의 축차투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장개석군에 실력을 과시한 뒤에 조기에 사태의 수습의 방향으로 기울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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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장래 있어야 할 정보 조직을 이미지 하면 다음과 같은 기본방침이 떠올라 온다. 우선, 일차 정보 수집 기능의 강화는 이 제안 속에 해당되지 않는다. 일차 정보의 수집 기능을 경시할 생각은 없다. 일본에는, 벌써, 외무성, 방위청, 공안 조사청, 내각 조사실이 각각 정보 수집 기능을 갖고, 근래에는 스파이 위성도 가지는 것이다. 이 기능을 강화할 필요를 인정하는 데 인색한 건 아니지만, 거기에는 매년 매년 예산과 기구를 쌓아 올려 갈 수 밖에 없다. 이제 와서 나카노 학교를 부활시키는 것도 불가능하고, 계속 충실하게 노력하는 수 밖에 없다. 기본적으로는 기존의 조직으로부터 일차 정보를 입수하면 좋다. 그 때문에, 모든 일차 정보가 중추에 모이는 조직이 필요하고, 또, 최고 정보 담당자는, 정부내 각 정보부국으로부터 상시 정보의 제공을 받게 되는, 신뢰 받아 존경받는 인물이 아니면 안된다.

하지만 나는, 종래, 정보라고 하면 곧바로 일차 정보 수집력 강화만을 논하는 경향에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정보가 총리 관저에 전해지는 것이 늦었다고, 사건의 발발을, 외무성이 우선 텔레비전으로 안 것은 추태라고 하는 정보 감각이다. 일차 정보는 어디에서 와도 괜찮다.물론 텔레비전, 라디오로부터로 좋다. 화재의 정보 등은 현장 부근에서 자고 있던 부랑자가 맨 먼저에 마련이며, 그래도 상관은 없다. 모든 것은 그 후의 판단과 처치가 문제이다. 아마 이런 정보 감각은, 뉴스의 스쿠프 전투에서, 타사가 석간인데 자신만은 그 전의 조간에 내서 훈장을 받을 수 있는 신문기자 감각을 그대로 정보 사무에 "적용시키는 데 불과한 것이다" . 내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은 대국적인 정세 판단과는 무관하다. 정보가 반나절 늦어도 3일 늦든, 정확한 정세 판단을 행하는 편이 훨씬 중요하다.

이런 저차원의 경쟁 감각은 저널리즘 뿐만이 아니라, 정보 기관 부내에도 있다. 위로부터 칭찬받을 수 있을 것 같은 좋은 정보를 주우면, 다른 정보 기관에 알리지 말고, 럭비공을 다루듯이 혼자로 관저에 올리고 싶어한다. 자신의 공훈으로 하고 싶은 것이다. 미국에서는, CIA, NSA, INR, DIA, FBI 등은 클로즈드·서킷 TV를 갖고 있고, 일차 정보는 동시에 전부 전달되도록 하게 있다고 한다. 즉, 일차 정보는 즉시 공유하되 분석과 판단을 복수 정보로서 서로 경쟁하는 시스템이다.이것도 오랜 세월의 경험으로 달성한 지혜일 것이다. (끌쎄요 9.11 건을 보면 별로 그런 것같지도 않은 것 같은 데요)

또 나의 경험에서는, 일차 정보를 입수하기 위한 최대의 수단은 미국과의 우호 신뢰 관계를 강화하는 것이다. 미국이 세계에 가지고 있는 정보량은 일본의 수십배일 것이다. 그 일부분을 나누어 주는 것만으로 일본이 모을 수 있는 정보보다 많다. 영일 동맹이 폐기된 뒤 일본의 정보의 질의 저하에 대해 생각이 미치는 것만으로도, 그 사이의 사정은 알 수 있다. 미국이 정보를 일부분 숨기는 것은 있을것이다. 기밀 정보의 정보원을 숨길 필요도 있을 수 있고, 보기 드물게, 사안에 따라서는 일본에는 알리지 않는 편이 좋다, 라고 상대방이 생각하는 일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 일차 정보 후에 서서 내리는 대국적인 판단에서는 거짓말은 속임수가 없다. 반대로, 상대방의 대국적 판단 속에, 숨겨진 일차 정보가 있는 것을 추정하는 일도, 숙련되어 오면 가능하다. 이 것도 모두 앵글로·색슨의 취급 방법의 일부이다. 미국으로부터 정보를 받으려면 반대 급부로서 일본 독자적인 정보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올바르다. 일본의 각종 정보 기관의 업무의 큰 부분은, 미국과의 정보교환으로 할애해지고 있다. 단지, 그것과 동시, 혹은 그 이상으로, 미국은 일본의 정보교환 능력이 한정되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므로, 중요한 것은 미국측이 일본측의 접촉상대에 대하여, 이 사람은 정보 라는 데 뛰어난 인식을 갖고, 신뢰할 수 있어 이 사람과 접촉하는 것이 가치가 있다라고 생각할 만한 인재를 기르는 것이다. 스파이 방지법이 없는 조건아래에서는 인간의 신뢰 관계가 더욱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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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기본적 생각은, 조직의 중심이 되는 인간은, 관료적 인사가 아니라, 개인의 능력과 식견에 의거하여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각 성청의 자리나눠먹기식 출향 배정은 하지 말 것) 이것도 차원이 낮은 이야기이지만, 정보 조직에 대해서는 종래 권한 싸움이 있다. 내각 조사실장은 경찰 출신, 차장은 외무성 출신으로 정해져 있는 것도 권한 싸움의 타협의 산물이다. 나는 방위청에서 모든 정보 사무의 통솔을 담당하였다. 권한 싸움 등을 도외시하고 있던 당시의 마루야마 타카시丸山昴 차관( 구 내무성 고등문관 출신의 경찰관료)의 고결한 인사였지만, 당시라도 경찰 부내로부터 강한 반발이 있었다고 들었다. 최근의 옹졸한 권한 싸움의 세상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인사이다.

이미 말한 것처럼, 당시는, 정보라고 하면 공산권 또는 국제 공산주의 정보였으므로, 외무, 경찰이 경합 하는 형태였다.지금은 아마 다르겠지만, 나는, 그런 일은 어디라도 좋다고 생각한다. 사무국은, 내각 조사실이라도, 외무성의 국제 정보국이라도도, 혹은 국제 문제 연구소이라도 어디든지 좋다. 어차피 사무국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이다. 요점은 경험도 부족하고, 단 2년의 임기밖에 그 직을 맡지 않는 관료가, 세계의 정세를 분석하고, 이것을 내각에 보고해 국가의 정책에 이바지한다고 하는, 지금까지의 본래적으로 불가능한 시스템만 없어지면, 그 것으로 좋다는 것이다. 나의 경험으로부터 말하면, 책임자는 10년간은 계속해 정세 판단에 전념해 주었으면 한다.그 사이, 매일, 매주, 매월의 정세의 움직임을 쉼 없이 보충해, 그리고 그 사이에 그 전의 10년간, 20년간, 백년 사이에 거슬러 올라가 과거의 경위에도 통달 해 주었으면 한다.그리고, 또, 그 사이에 동서 고금의 역사를 이했으면 싶다. 그렇게, 역사의 큰 흐름을 알아, 역사의 흐름 속의 현재의 위치를 항상 파악하고 있으면 좋은 것이다. 연령은 60세 이상이 좋다. 종합적인 판단력은 해와 경험과 함께 진행된다. 나 자신, 외무성, 방위청에는 미안하지만, 현역에 있을 때보다 지금 쪽이, 훨씬 잘 사물이 보인다. 최근에는 모두 장수를 하지만, 인간이라는 것은 나이와 함께 체력은 쇠약해지지만, 총합판단 능력은,노쇠( 망령)耄碌 할 때까지 계속 성장하다고 생각한다. 조직의 하나의 견본이 되는 것은 미국의 NIO(National Intelligence Officer 국가 정보관) 제도이다. 그 후 변천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알고 있는 무렵에는, 동 아시아, 중근동, 소련권등을 담당하는 지역 전문가 몇 사람과 군사, 경제등 기능별의 전문가 두, 세 명이 상시 대통령의 자문에 대답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나는 일본에도 국가 정보관을 마련하는 것을 제안하고 싶다.

단지, 일본에는 미국과는 다른 사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다른 것은, 먼저 설명한 도쿄와 나고야의 차이이다.일본의 NIO는, 그 전문이 소련이든지, 중국이든지, 군사이든지, 경제이든지, 동시에 미국의 전문가도 아니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베트남 전쟁의 전망을, 공산권 분석과 군사력의 비교만으로 논해 버린 잘못을 반복하게 되어 버린다. 분야별의 전문은, 각 NIO의 경력에 의해서 저절로 나오겠지만, 초부터 전문을 결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전문을 만들면, 외무성의 각 지역국이나, 각국 내 관청의 사무와 중복하여, 옥상옥를 거듭하게 되어 버린다.

또, 나의 경험에서는, 경제라든지 군사와 같은 전문 분야에서는, 세계의 큰 흐름을 볼 때 꼭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듯한 케이스는 1년에 2, 3회 있을 뿐이고 본다 그 외는, 각 성청, 각 연구소, 각 기업 조사부 등이 24시간 추적하고 있는데 종래대로 맡기면 좋고, 또, 그 이상을 하기도 어렵다. 실제적인 것은, 경제, 군사의 최고급의 전문가와 NIO가 모여 회식하면서 의견교환 하는 기회를 달에 한 번 마련하고, 가장 대국적으로 중요한 흐름만을 파악하도록 노력하는 것 있을것이다.또 NIO는, 미국의 유식자와 항상 교류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지면 좋겠다.10년의 임기의 처음의 2, 3년에 그 실력을 생기면 좋겠지만, 그 전부터, 각종 세미나, 심포지엄에 일본의 얼굴로서 출석하고 있는 사람 중 적격자가 나오면, 그 편이 효율이 좋다.

본인의 양해도 얻지 않고 이름을 드는 것은 실례이지만, 이미지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굳이 예시를 들고 싶다. 도쿄대학의 다나카 아키히코田中明彦 (도쿄 대학 교수 . 현 토쿄 대학 동양문화연구소 소장 . 현재 웹상에 동양문화연구소 다나카 아키히코 연구실에 세계와 일본이라는 이름으로 20세기 일본 대외 관계 자료집등을 모은 데이터베이스가 운영되고 있다 . 일본과 각 국 간 혹은 다자간의 각종 조약 협정 외교관계 주요 요인들의 발언 연설 외교사 연표 등이 정리되어 있어 해당분야를 개괄하는 데 유용할 것으로 봅니다 관심 있으시면 한 번 가 보시길 田中明彦研究室)교수는, 잡지에서, 세계 주요지의 논설을 몇 년이나 빠뜨리지 않고 소개하고 있다.이것은 상당한 축적이라고 생각한다.원래 다나카씨는, 시사 관계에도 자세하고, 또 근대사의 지식도 풍부하니 , 장래 정년 후라도 ( 이 직을) 맡아 주시면 바로 전력이 된다.

쿄토대의 나카니시 테루마사中西輝政 (이 전 포스팅에 언급한 바 있지만 교토대학 교수로 국제정치학 전공 정보사 정보 연구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으며 정보사 연구회를 설립 )교수는, 그 「대영제국 쇠망사」를 보면, 시사의 문제에 전념해 주실 수 있다면 적임자라고 생각한다. 같은 의미로, 시오노 나나오 씨 등은, 그토록 로마의 흥망의 역사에 정통하고 있으니까, 지금부터 미국의 현대의 공문서를 정독하는 귀찮은 작업에 종사할 생각이 있다면 적임자라고 생각한다. 즉, 치란흥망의 리를 알고 있는데다, 매일의 정보를 집요하게 쫓는다고 하는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조건이다. 반대로 고모리 요시히사 古森義久씨 등은, 시사 문제의 견해는 벌써 프로중의 프로이기 때문에,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대국을 보려는 기분이 있으면, 당장이라도 도움이 되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외무 관료로는, 주한공사, 아시아 국장, 총합 정책국장, 이스라엘 대사, 차관을 역임한 카와시마 유타카川島裕씨 등은, 그 분석력, 교양, 미국을 잘 알고 있는 경력으로부터 말해도 바로 전력이 될 것이다.

세대가 달라서인지 중국 고전 세계의 치란흥망의 역사를 잘 아는 야스오카 마사도구安岡正篤과 같은 사람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은 안타깝지만世代の違いで中国古典世界の治乱興亡の歴史に詳しいかつての安岡正篤のような人が思い当たらないのは淋しいが, 일급 인물이면, 재임중에 「사기」 「18사략」등을 정독해 주시면 그것으로 좋다고 생각한다.

외무성에는, 그 밖에도 잠재적인 인재는 많기 때문에 있을것이다가, 내가 직접 알고 있는 사람만을 말하게 해 주면, 나의 분석 과장 시대 수석 사무관을 연달아 맡아 준 이토 켄이치伊藤憲一(현 국제정세연구회 이사) 씨, 전 타이 대사 H·O, 내가 국장 시절 분석 과장이었던 S·S벨기에 대사, T·M 이란 대사는, 나와 같은 정보 의식을 가지고 주고 있는 사람들이다 . 또, 방위청 참사관, 정보 조사 국장의 양쪽에서 나의 후임을 맡아 준 아라이 고이치新井弘一 전 대사는, 이전에는, 자료과의 수석으로서 이토 켄이치씨의 선임이었던 일도 있어, 나로 같은 정보 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비밀의 보장 유지는 별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참고로 제공하는 미묘한 일차 정보를, 그 정보에 한에서는 보비의무를 부과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원래 NIO의 일은, 그런 정보를 주진이라고 보고하기 위하여 내각에 가지고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일은 사무국의 관료의 일이다. 지금까지대로 하면 좋다. 또 NIO는 이미 성숙한 사람이므로, 「나는 이런 일을 알고 있다」라고 외부에 자랑하거나 하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또, 그러한 인물만을 임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NIO의 일은, 모든 정보를 소화한 위에 대국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에 있다. 그 기초의 하나로 비밀 정보가 있어도, 거기로부터 나오는 대국적 판단은 은밀한 것도 아무것도 아니다. 오히려 은밀하게 하지 않는 편이 좋다. 이것 을 신문, 잡지등에 개인명으로 공표하는 것에 의해서, 각 방면의 판단을 받아, 한층 더 판단을 연마해 정보의 정도를 올릴 수 있다. 또, 뛰어난 정세 판단은 모두 국민에게 알려 국민 자체가 올바른 정세 판단에 익숙케 있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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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은, 3, 4명을 우선 10년의 임기로 임명하고, 그 5년 후에 그 후임 겸 보조를 10년의 임기로 임명한다. 퇴직 후에는 노쇠(망령) 할 때까지 고문을 맡긴다. 예산은, 한 명의 인건비가 오버헤드(비서, 사무실비, 여비, 교제비)를 포함해 연간 3천만엔으로서 당초1억2천만엔, 5년 후에는 2억4천만엔, 고문비를 입금시켜도 연간 3억엔 정도이다.외무성 기밀비 속의 낭비를 삭감하고, 본래의 목적인 정보로 사용하는 것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이 것만큼으로도, CIA 등의 피라미드의 정점으로 상응하는 정보 조직을 만들 수 있다.

오버헤드 속에서 여비는, 나의 경험에로는, 대부분은 회의 개최측이 부담하는 제회의 출석인 것으로 얼마 되지도 않는다. 자기 경비의 출장은 1년에 2회 정도면충분하다.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교제비이다. NIO는, 예를 들어 중국 문제라든지 러시아 문제에 대해서, 각각 달에 한 두개의 스터디 그룹을 여는 정도 경비가 필요하다.

마시고 한편 먹으면서 활발한 담론한다. 이 것은 동양만의 전통은 아니다.심포지엄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그리스어로 향연의 의미이다. 한 명 단가 천엔의 도시락으로 논의가 활기를 띨 리는 없다. 호화로울 필요는 없지만, 중화 요리가 테이블을 둘러싸고 일인 1만엔 정도 사용할 수 있으면, 저녁에, 마음껏 논의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 수 있고 그 때문에, 결국 그 편이 비용 대 효과가 크다. 열 명으로 구성된 , 2 그룹을 십개월 운용하면 연간 2백만엔으로 해결되는 이야기이다. 원래 정보 활동에는 음식이 불가결하다.그 외에도 요인과의 회식의 비용도 필요하다. 더 낮은 차원의 정보 공작에서도 정보 제공자에게 돈을 받게 하도록 하기 전에는, 음식이나 교제가 깊어지기 위해서 고액의 경비를 필요로 하는 것은 보통인 것이다. 음식의 경비에 상한을 마련한다고 하는 구두쇠적인 생각은 정보 활동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만약 상한을 마련할 필요가 있으면, 그것을 넘는 부분이야말로, 확실히 외교 기밀비가 가장 유효하게 사용되어야 할 분야이다. 남용을 억제하는 것은 양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런 의미에서도, NIO에는 일급의 인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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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점은, 일상의 잡무에 시달리지 않고 상시 빠뜨리지 않고, 부하에게 맡기지 말고 스스로 자료를 읽고 생각해 시류에 초연하여 유행의 논의에 영합 하는 일 없이, 또, 정책론에 맞장구를 치는 일 없이, 어디까지나 객관적 판단이라는 분석을 관철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조직은 내외에 있어 존경받아 외국의 최고 정보 기관과 고도의 지적 교류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조직은 역사에도 별로 전례는 없을 것이다.한의 장량, 진평이라든지, 촉의 제갈량이라든지, 개인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조직으로서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몽상이라고 할지도 모른다.그 러나, 과거서 할 수 없었던 것이, 만약 현대서 할 수 있다고 하면, 그 한 가지로 인간의 수명이 늘어난 것이다. 제갈량은 53세에 숨졌다.같은 나이에서는 제갈량에게는 도저히 미치지 않다고 해도, 그때부터 20년 정세 판단을 배우는 것에 의해서, 그리고 또 그러한 사람이 세 명 모이는 것에 의해서, 같은 정도로 치란흥망의 리를 연구할 찬스는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혹은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적어도 쇼와 전기에 일본을 파멸로 이끈 것 같은 정세 판단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다고 하는 노력은 할 수 있고, 그것이 가장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은, 제2차 대전의 교훈으로부터 배워 정보의 조직·시스템을 혁명적으로 개선해 정보 대국이 되고 있다. 정보전에 져 파멸한 일본이야말로, 정보 체제를 재건을 절실히 느껴야 했지만, 전후는 경제 재건에 매진하였기 때문에, 방위와 함께 정보는 전후에서 재건이 가장 늦은 부문이 되어, 미국의 CIA나 NSA와 일본의 정보 기관과의 사이의 격차는 예산 규모로 아마 백배 이상일 것이다.

21세기를 맞이하여,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살아남아 가기 위해는, 뒤늦게나마, 정보 체제의 정비가 불가결하지만, 이제 와서 백배의 격차를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거의 전쟁 전 상태로 근본적으로 개량되어 있지 않은 일본의 정보 조직을, 적어도 그 톱의 부분만큼은 정보 선진국인 미국을 모방해 개선하고, 거기에 일본 독자적인 조건도 생각해 또 동양 고전적 발상을 일부 도입하여, 미국과 영국이라고 해도 생각이 미치지 못한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에 의해서, 수억엔정도의 예산에 의해서, 이 격차의 상당히 부분을 메울 수 있다. 다행히 요시다 총리 이래, 한정된 범위이지만 외교 기밀비 중 필요한 것은 인정되고 있다.이 제안은, 이 한정된 예산의 그 일부를 본래의 목적으로 활용하는 것만으로 실현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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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행인1 2005/06/24 14:53 # 답글

    결국 정보의 가치를 결정하는건 인간이라는 것 같군요.
  • Fillia 2005/07/30 18:36 # 답글

    우연히 와서 이 글을 읽었습니다.
    정말 읽기 어려운 글이군요.... '번역기 문체'가 많이 진화하면 이정도까지는 갈 수 있는 것인가 싶습니다.

    '미국이라는 것은 없다'라는 부분과, 왜 그러한가를 설명하는 부분이 인상적이군요. 한국도 '미국이라는 것이 있다, 아니 있어야 한다'고 확신하는 나라들 가운데 하나라고 보이는데요... ^^;
  • gforce 2005/11/23 13:18 # 답글

    좋은 글입니다.


    ...만, 9/11에서 미 정보공동체의 삽질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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