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 암살사건에 대한 잡설 1
이 나가지마라는 이 햏의 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앞서 언급하였던 와타나베의 마츠에 지검 공술서에서 진술된 바에 따르자면 나가지마는 관동군 특무기관 소속으로 와타나베와 중국에서 같이 활동을 하였고 와타나베가 돌아간 후에도 계속 중국에 남아 있다가 전후 국부군의 정보기관에 가담하여 여기에 복무하였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후 나가지마는 OSS와도 관련을 맺여 그 휘하에 적을 두고 근무하였으며 그 후 국민당 패망 후 중국을 탈출해 대만으로 갔다가 국부군 기관 측의 요청으로 모종의 특수임무를 수행하기위하기 위하여1950년 일본에 온 후 GHQ측 첩보요원이 되었고 그 후에도 계속-사건 당시인 60년대 초까지도- 미국측과 끈을 가지고 정보활동에 관여하고 있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旭洋丸 사건과 관련하여 일부 언론과 서적에 나온 나가지마의 증언을 보면 나가지마는 하얼빈 특무훈련소를 나와 잠시 마적에 투신하였다가 그 후 특무활동쪽으로 복귀하여 하얼빈 특무기관(관동군 계열의 특무기관으로 주로 대소련 정보 공작 담당.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와타나베는 나가지마가 관동군특무기관원이라고 진술한 것은 이 하얼빈 특무기관 소속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과 북지나군 소속 으로 활동하였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또 한 나가지마는 마적 일대라는 제목으로 자서전을 쓰기도 했었는 데 이 책은 입수하지못해서 다른 서적에서 나온 인용 부분밖에 언급할 수 밖에 없군요 사실 이 책에 나온 내용이 본 주제와 관련된 나가지마 증언의 중요부분입니다)
여기서 旭洋丸 사건에 대한 그의 진술을 보면 '旭洋丸 사건은 내가 계획한 것이다 스파이를 보내 연락 파이프를 통하기 위한 것이었다 "라고 하여 자신이 이 사건을 주도했음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특히 그 이전부터 이어진 미국기관과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자신이 참여한 몇몇 정보공작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러한 공작 중의 하나로모택동 암살 사건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그가 주장한 증언 내용을 보면 제2차 세계 대전 이 끝날 무렵까지 중국에서 북지나 군 사령부 휘하에서 활동하던 그는 전쟁이 끝날 무렵 사령부명령에 따라 중국공산당 지도부를 습격하기위한 정보수집을 위하여 연안에 침입했다가 그 과정에서 패전 사실을 알게되어 탈출 10월 경에 북경에 도착한 걸로 되어 있습니다 . 북경에 도착한 이후 북지나군 참모부 소속 의 日高富明 대좌가 지휘하는 특무기관 日野 기관 소속으로 활동하다가 그후 이 기관이 국민당 쪽에 접수되면서 국민당 최고군사위원회 국제문재연구소 북경(당시 이름은 북평이지만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그냥 북경으로 씁니다)판사처 라는 곳에 근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기구는 사실 국민당 군사 정보기관 직할로써 나가지마 외에도 다수의 일본군이나 특무기관 소속원들이 근무하면서 국민당군의 정보활동에 종사하였다고 합니다. 나가지마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는 북경판사처에 근무하면서 또 한 동시에 비밀리에 국방부 제2청(군사정보기관)에도 적을 두는 이중소속에 있었다고 합니다. 또 한 이 무렵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OSS 역시 중국 각지에서 구 일본군 특무기관 요원들을 포섭 채용하여 정보요원으로 하였으며 -이런 대표적인 인물로 상해의 도이 아키오 중장 난징의 츠지 마사노부(대본영 작전의 신 님) 과 같은 이들로 있음- 이러한 활동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 긴밀한 연게 협력 하에 있었므로 나가지마도 이런 관계속에서 미국기관과도 연을 맺게 됩니다.
북경 주재 OSS는 당시 북경 판사처에서 금무하던 日高대좌 등 다른 북지나 군 참모부에 근무하던 이들에게 현금 지불과 귀국 협력을 내걸어 에이전트로 활용하였고 이 과정에서 日高 대좌를 책임자로 나가지마와 그외 인물들을 참여하는 OSS하의 하부 기관으로 日高 기관이 창설되어이들은 북경 주재 OSS의 손발로 활동하게 됩니다. (재미있게도 당시 북경 OSS가 입주한 六條公館 건물이 북지나군 참모부 2과 특무기관의 거점이었다고 합니다 ) 당시 나카지마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북경의 히다카기관은 내가 화북초공군단총사령부 2처에 모인 정보를 제출해서 , 여기에 분석을 가해서 정보 보고를 OSS에 제출하였는 데 그능력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고도의정치정보에 대해서도 자문한 일도 있다 " 이로 미루어 보건데 나가지마가 소속한 히다카 기관은 당시 국부군과 OSS사이의 중계 역할로써 양 측의 정보를 교류해 주는 역할을 맡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당시 전세는 국민당군의 패망으로 기울고 있었으며 이런 와중에서 전세를 뒤엎을 공방으로 모택동을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의 암살 지시가 내려졌다고 나가지마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의 책 마적 일대에 따르면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소화 23년(1948년) 7월 말의 어느 심야 OSS로부터 긴급소집을 받은 나는 OSS의 사무소가 있는 六條公館 에 들어섰다 거기에는 OSS의 제임스 소령과 日高 대좌가 기다리고 있었다 <모택동을 암살하고 싶다> 제임스 소령은 이렇게 말했다."
그 이후 제임스와 히다카 그리고 나카지마 세 명을 중심으로 암살계획이 입안되던 중 국민당 군의 패색은 점점 짙어져 갔고 공산군 측의 포위망은 갈수록 좁혀오는 상황이었고 이 들은 일단 북경이 공산군에 넘어간 후 암살을 실행하기로 계획하였다고 전합니다 그 내용을 보면 북경이 함락디면 공산당 측은 자신들의 승리를 선포하기 위하여 대규모의 군중을 모아 놓고 모택동을 비롯한 공산당 수뇌부들이 천안문 광장에 모습을 나타낼 것이니 그 떄를 틈타 단상을 박격포로 포격하여 수뇌부들을 일소하기로 계획을 진행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북경 함락이 임박해지자 계획을 초기에 입안했던 히다카나 나가지마 등은 북경을 탈출하고 구체적인 계획의 실행은 북경에 남아 있던 야마구치 류이치(山口隆一)라는 일본인과 이탈리아 인 안토니오 리바 등 에 의하여 진행되었고 이 들은 천안문 광장 앞의 다리에 박격포를 숨겨놓고 거기서 단상을 포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1950년 이 계획이 탄로나서 이 들은 중국공안에 체포되어 사형 종신형 등 중형을 선고받은 것으로 이 음모는 무산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북평에 남아 있지 않고 탈출한 것에 대해서 나가지마는 자신은 OSS뿐 만 아니라 국민당 정부군에도 적을 두고 그 관련 업무-특히 일본 구 군 및 특무 기관 요원들과의 관계에 있어- 있었기 때문에 국민당 정부와 같이 나간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 후 대만으로 탈출한 후 대만 경비총사령부 (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도망친 후 대만지역에 선포된 계염령을 집행하던 계엄사령부)에서 거류일본인 담당 부서의 책임자(대략 소교 급 나가지마의 말에 의하면 중교 대우의 소교였다고 함)로 근무하면서 모택동 암살 계획의 실행을 감독하다가 이 임무와 함꼐 다른 특수임무를 실행할 책임을 지고 주일국민당 대표부의 정보장교로 일본에 왔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 후 일본에 온 후 OSS의 연계와는 별도로 당시 GHQ G2 산하의 특무기관에 의해 연금되었다가 이 기관의 에이전트로 활동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나가지마가 일본에서 수행할 목적을 띄고 파견된 또 다른 특수임무란 동아 의용군 혹은 대만 의용군 이라고 불리우는 건으로 당시 구 일본군 고급 장교들을 비록한 구 군인들을 의용군 형식을 빌려 모집하여 국민당 군대를 지원하게 하는 계획이었습니다. 이 대만 의용군 건은 언젠가 한 번 다뤄볼까 하지만 관련자료가 당최 부족하니... 그외 나가지마의 증언에는 다른 재미있는 사실도 많지만 사실관계를 증명하기 어려운 게 많으므로 넘어갑니다)
나가지마의 증언은 흥미롭긴 하지만 그의 주장 에서 몇 가지 사실관계에 대힌 의문이 발견되고 또 과장 여부-니가지마가 설령 OSS나 국부군 기관에 근무했다 하더라도 자신이 말한 것처럼 장교급의 대우를 받고 상당히 깊숙한 곳까지 다룬 인물이었는 지 막말로 저런 기관에서 하급 심부름꾼 역할을 했는지 알 게 뭡니까- 등의 문제로 신뢰성을 부여하기는 어려웠고 이를 입증할 다른 자료도 없었습니다 . 그런데 작년 7월 보도된 모택동 암살에 대한 중국 보도를 인용한 일부 언론 기사들을 보면 여기와 관련된 내용이 나와 있었습니다(링크 참조)
美 1950년 毛澤東 포격 암살 기도 연합뉴스
미국 50년 毛澤東-周恩來 암살기도
당시 이 건에 대하여 교도통신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신중국 탄생의 다음 해인 1950년 국경절 10월 1일에 미국정보기관이 북경의 천안문 망루에 도열하고 있던 모택동 주석을 비롯한 중국지도자를 암살하려고 계획, 이를 미연에 적발한 중국 측에 의하여 주범 격인 일번인과 이타리아 인을 사형에 처한 사건의 경위가 24일 중국 외교부가 공개한 외교문서에서 확인되었다. 중국 미디어에 의하면 , 외교 문서는 사형된 일본인 남성 「야마구치 류이치」씨에 대해 「원래 일본의 특무(스파이) 로 , 46년에 미 특무 기관인 전략정보국OSS의 정보원이 되었다」라고 하고 있다 이 문서에 의하면 , 미 정보기관이 50년 1월부터 암살 계획에 착수해 , 야마구치 씨 등이 준비를 진행시키고 있었지만 , 동씨가 동년 9월에 토쿄의 미군 사령부에 보낸 편지를 북경시 공안국이 입수해 발각.관계자 전원이 체포되어 사건에 사용할 예정이었다고 보여지는 박격포나 피스톨 , 수류탄등이 압수되었다 (교토 통신 2004년 7월 24일)
【北京24日共同】新中国誕生の翌年、1950年の国慶節(10月1日)の際、米情報機関が北京の天安門楼上に並ぶ毛沢東主席ら中央指導者の暗殺を計画、未然に摘発した中国側が主犯格の日本人とイタリア人を死刑にした事件の経緯が24日までに、中国外務省が公開した外交文書で確認された。中国メディアによると、外交文書は死刑となった日本人男性の「山口隆一」氏について「もともと日本の特務(スパイ)で、46年に米特務機関である戦略情報部門の情報員になった」としている。同文書によると、米情報機関が50年1月から暗殺計画に着手し、山口氏らが準備を進めていたが、同氏が同年9月に東京の米軍司令部に送った手紙を北京市公安局が入手し発覚。関係者全員が逮捕され、事件に使う予定だったとみられる迫撃砲やピストル、手りゅう弾などが押収された。(共同通信)[7月24日19時4分更新]
일단 중국 법제만보를 전제한 문히보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귀차니즘으로 대략 옮긴 거라서 오역이 있을 수도 있으니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950년 미국간첩 천안문 포격 사건에 관하여서 이미 민간에 있어서 여러 가지 판본으로 전해왔다. 이제 막 기밀 해제된 외교부 문서에서 이 사건에 관계된 문서들을 손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54년간 밀봉되어 있던 문서는 당시 소수 몇몇만이 알고 있던 사실을 드러내보여준다 關於1950年美國間諜陰謀「炮轟天安門」事件,民間已經有許多版本。日前,從外交部剛剛解密的一批檔案中,人們可輕易看到相關的檔案文件。這份密封了54年的文件揭開了當時一些鮮為人知的史實
미국간첩분자 리안동( Antonio Riva) 馬迪懦(Ma Di Nuo 덕국인) 야마구치 류이치 3명은 일찌기 1950년1월에 10.1 국경절 시 천안문 포격 계획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시 간첩분자들이 천안문을 포격하는데 사용하려고 했던 것은 82mm박격포 한 문이었다. 이 외교부 문서에 근거하면 북경 해방 전 미국특무기관은 /북경에 있던 미국특무기관은 해방 전 이 82 박겨포를 구호물자 속에 숨겨서 리에게 주었다 리는 이 박겨포와 포탄을 자기 집과 마디누오 집에 분산해서 몰래 숨겨놓았다 美國間諜分子李安東、山口隆一、馬迪懦(Ma Di Nuo 덕국인)3人,早在1950年1月間就開始著手準備在「十一」的時候「炮轟天安門」。當時,間諜分子想用來「炮轟」天安門的工具是一門82迫擊炮。據這份外交部檔案記載,美國特務機關在北京解放前夕,把這門82迫擊炮掩藏在救濟物資中交給李安東。李安東又將這門迫擊炮和炮彈分散暗藏在自己和馬迪懦家中
행동계획에 착수한 후 야마구치는 5월에서 7월 동안 천안문에 가서 광장주변의 지형을 측량하곤 했다. 그는 천안문 모양과 주석대를 지시목표로 겨낭한 스케치를 그렸다. 연필로 그린 이 천안문 주변 지형도에는 천안문 주석대가 사격지시목표로 그려져 있었다. 御河橋에 놓여져 있는 화기에서 굵고 검은 포물선 하나가 바로 천안문 성루중앙의 모주석초상으로 뻗어져 향하고 있었다. 定下行動計劃後,山口隆一在5月到7月間,經常親自跑到天安門去測量廣場周圍的地形。9月16日,他繪製了一張天安門的圖樣和向主席台射擊的指示目標。這張用鉛筆繪製的天安門地形草圖,畫出了射擊天安門檢閱台的指示目標:從御河橋上放的一滅火機上,一條又粗又黑的拋物線直指天安門城樓中央的毛主席畫像。
9월 26일 야마구치가 토쿄저령군사령부에게 발송한 정보에서 음모의 계획가능성을 상세하게 평가하면서 <돌연히 사정이 생거 난관이 생기고 만약 저렇게 된다면 야마구치는 도망가야 하며 다른 수가 없다> 만약 이 음모가 실현 되지 않고 또 폭로되지 않는다면 , <그렇게 되면 즉시 빠져나갈 것을 계획한다, 그러나 이런 중요한 계획을 결단코 포기할 수 는 없기에 임무를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같은 건 바보스러운 일이다. 그러니 마음 놓기를 바란다> 9月26日,山口隆一向東京美國佔領軍總部發出的情報中,詳細估計了這一陰謀計劃的可能性,「事情很突然,裏面是有枝節的,如果是那樣的話,山口隆一要逃跑,別無他招。」要是陰謀不能實現,而又不暴露,「那樣的話,打算立刻躲避起來,但是決不能放棄這個重要任務,如把使命放下的等等說法是笨的計劃,所以這點請安心。」
야마구치가 토쿄에 보낸 편지는 북경시 정사처에 의해 입수되었다. 이 편지가 보내어지는 곳은 일본 토쿄도 시부야 구 神泉마치 20번지 7호 제일선 C관리실로 비밀검사를 통하여 서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CIC 본부: 산 소화기를 10월 1일에 보내기로 정헀음,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어 가고 있음. 열렬히 안부를 전함(안부에 열렬하다는 말을 쓰는 건 좀 이상하지만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어 그대로 옮깁니다). 然而,山口隆一寄往東京的郵件被北京市公安局偵查處截獲了。信件的投送地址:日本國東京都澀谷區神泉町20番地7號第一綠C管理室。經過秘密檢查,信件的內容是:CIC總部(日本東京美國盟軍司令部CIC情報處--編者註):所購滅火機定於10月1日發貨。一切按既定計劃進行。致以熱烈的問候!
북경시 공안국 2처는 즉각 경각심을 느껴 야마구치 주변에 대해 비밀 감기와 조사를 진행하여 재빨리 저 거대한 외국간첩조직과 그 음모를 발견해냈다. 9월 26일 양 주범 과 그외 다른 공범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北京市公安局二處立刻警覺起來,圍繞山口隆一進行了嚴密的監視和偵查,很快發現了這個巨大的外國間諜組織及其陰謀。9月26日,兩名主犯李安東和山口隆一及其他案犯全部落網
외교부 비밀문서에 의거하면 시 공안국은 리안동 집에서 야마구치가 그린 천안문 주변 지형도 82 밀리 박격포 한 문 권총 두 정 수류탄 8개 포탄과 그 자탄 650여발 독약 두개? 그리고 특무신원 서류및 다량의 중국 군사 정치 경제 정보초고를 발견했고 이들 정보중에는 아군의 부대 번호 및 지휘관 이름 지지 자동차 상표들도 딸려져 있었다 據此份外交部解密檔案記載,市公安局從李安東等人家中搜出山口隆一繪製的炮轟天安門圖樣底稿一張、82迫擊炮一門、手鎗兩把、手榴彈8枚、炮彈和各種子彈650多發、毒藥兩件,還有特務證件及大量的中國軍事、政治、經濟的情報底稿,有的情報上還附有我軍的部隊番號和領導人姓名、地址、汽車牌號等。
수개우러 동안의 거듭된 신문 끝에 51년 8월 17일 주범 는 법에 따라 사형을 선고받아 바로 천교 형장으로 호송되어 총살이 집행되었다. 공범 魏智 亨利 (We Zhi. hengLI 이 거 가차 표기라서 원래 이름을 모르겠음 ) 甘納斯(Gan Na Si) ( 이상 프랑스인)馬迪懦(Ma Di Nuo)、哲立(Zhe LI) 이상 독일인、마 신 칭馬新清(중국인) 등은 무기징역과 유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아는 바로는 이들은 형기만료 후 우리정부에 의해 국외추방되었다고 한다 經過數月的反覆審訊,1951年8月17日,該案主犯李安東、山口隆一被依法判處死刑,立即押往天橋刑場執行槍決;同案犯魏智.亨利、甘納斯(德國籍)、馬迪懦、哲立(德國籍)、馬新清(中國籍)等被分別判處無期徒刑和有期徒刑。據悉,他們刑滿後被我國驅逐出境
리안동 ( A ntonio Riva ) 이탈리아 인 1896년 상하이 생. 1948년 그는 전 북평 영사관 주재 미국무관 包瑞德(Bao Rui de) 지휘 하에 정식으로 특무간첩활동을 시작했음. 李安東,意大利人,1896年生於上海。1948年,他開始正式在前美軍駐北平領事館上校武官包瑞德的領導下進行特務間諜活動。
야마구치 류이치 전 일본특무 출신으로 1946년 정식으로 미국특무간첩기관 전략정보처 OSS 에 가담하여 agent가 됨. 1946년 5월 북경에 있던 프랑스 어 서관 대리상인 We Zhi. hengLI의 소개로 Liva를 알게 되어 그의 지휘하에 정보수집을 담당. We Zhi는 서점 경영을 커버로 하여 리바에게 정보를 제공 하고 야마구치의 간첩활동에도 커버를 제공 Ma Di Nuo는 천주교 자의 주교(아마 주교의 보라빛 복색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 로 사건 전후에 Riva와 Bao Rui de에 정보를 제공하고 또 리바를 위하여 무기를 숨겨주고 정보 초고를 비밀리에 보관했음 山口隆一原為日本特務,1946年正式參加美國特務間諜機關戰略情報處,為情報員。1946年5月在北京法文圖書館經理魏智.亨利的介紹下認識李安東,並在李的指示下搜集情報。魏智.亨利借開書店作掩護,為李安東提供情報,並掩護山口隆一進行間諜活動。馬迪懦為天主教紫衣主教,先後給包瑞德、李安東等人供應情報,並為李安東窩藏軍火武器及隱匿情報底稿。 (摘自《法制晚報》)

당시 범인 관계도

야마구치 류이치가 작성한 천안문 주변 스케치
이 나가지마라는 이 햏의 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앞서 언급하였던 와타나베의 마츠에 지검 공술서에서 진술된 바에 따르자면 나가지마는 관동군 특무기관 소속으로 와타나베와 중국에서 같이 활동을 하였고 와타나베가 돌아간 후에도 계속 중국에 남아 있다가 전후 국부군의 정보기관에 가담하여 여기에 복무하였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후 나가지마는 OSS와도 관련을 맺여 그 휘하에 적을 두고 근무하였으며 그 후 국민당 패망 후 중국을 탈출해 대만으로 갔다가 국부군 기관 측의 요청으로 모종의 특수임무를 수행하기위하기 위하여1950년 일본에 온 후 GHQ측 첩보요원이 되었고 그 후에도 계속-사건 당시인 60년대 초까지도- 미국측과 끈을 가지고 정보활동에 관여하고 있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旭洋丸 사건과 관련하여 일부 언론과 서적에 나온 나가지마의 증언을 보면 나가지마는 하얼빈 특무훈련소를 나와 잠시 마적에 투신하였다가 그 후 특무활동쪽으로 복귀하여 하얼빈 특무기관(관동군 계열의 특무기관으로 주로 대소련 정보 공작 담당.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와타나베는 나가지마가 관동군특무기관원이라고 진술한 것은 이 하얼빈 특무기관 소속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과 북지나군 소속 으로 활동하였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또 한 나가지마는 마적 일대라는 제목으로 자서전을 쓰기도 했었는 데 이 책은 입수하지못해서 다른 서적에서 나온 인용 부분밖에 언급할 수 밖에 없군요 사실 이 책에 나온 내용이 본 주제와 관련된 나가지마 증언의 중요부분입니다)
여기서 旭洋丸 사건에 대한 그의 진술을 보면 '旭洋丸 사건은 내가 계획한 것이다 스파이를 보내 연락 파이프를 통하기 위한 것이었다 "라고 하여 자신이 이 사건을 주도했음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특히 그 이전부터 이어진 미국기관과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자신이 참여한 몇몇 정보공작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러한 공작 중의 하나로모택동 암살 사건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그가 주장한 증언 내용을 보면 제2차 세계 대전 이 끝날 무렵까지 중국에서 북지나 군 사령부 휘하에서 활동하던 그는 전쟁이 끝날 무렵 사령부명령에 따라 중국공산당 지도부를 습격하기위한 정보수집을 위하여 연안에 침입했다가 그 과정에서 패전 사실을 알게되어 탈출 10월 경에 북경에 도착한 걸로 되어 있습니다 . 북경에 도착한 이후 북지나군 참모부 소속 의 日高富明 대좌가 지휘하는 특무기관 日野 기관 소속으로 활동하다가 그후 이 기관이 국민당 쪽에 접수되면서 국민당 최고군사위원회 국제문재연구소 북경(당시 이름은 북평이지만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그냥 북경으로 씁니다)판사처 라는 곳에 근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기구는 사실 국민당 군사 정보기관 직할로써 나가지마 외에도 다수의 일본군이나 특무기관 소속원들이 근무하면서 국민당군의 정보활동에 종사하였다고 합니다. 나가지마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는 북경판사처에 근무하면서 또 한 동시에 비밀리에 국방부 제2청(군사정보기관)에도 적을 두는 이중소속에 있었다고 합니다. 또 한 이 무렵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OSS 역시 중국 각지에서 구 일본군 특무기관 요원들을 포섭 채용하여 정보요원으로 하였으며 -이런 대표적인 인물로 상해의 도이 아키오 중장 난징의 츠지 마사노부(대본영 작전의 신 님) 과 같은 이들로 있음- 이러한 활동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 긴밀한 연게 협력 하에 있었므로 나가지마도 이런 관계속에서 미국기관과도 연을 맺게 됩니다.
북경 주재 OSS는 당시 북경 판사처에서 금무하던 日高대좌 등 다른 북지나 군 참모부에 근무하던 이들에게 현금 지불과 귀국 협력을 내걸어 에이전트로 활용하였고 이 과정에서 日高 대좌를 책임자로 나가지마와 그외 인물들을 참여하는 OSS하의 하부 기관으로 日高 기관이 창설되어이들은 북경 주재 OSS의 손발로 활동하게 됩니다. (재미있게도 당시 북경 OSS가 입주한 六條公館 건물이 북지나군 참모부 2과 특무기관의 거점이었다고 합니다 ) 당시 나카지마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북경의 히다카기관은 내가 화북초공군단총사령부 2처에 모인 정보를 제출해서 , 여기에 분석을 가해서 정보 보고를 OSS에 제출하였는 데 그능력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고도의정치정보에 대해서도 자문한 일도 있다 " 이로 미루어 보건데 나가지마가 소속한 히다카 기관은 당시 국부군과 OSS사이의 중계 역할로써 양 측의 정보를 교류해 주는 역할을 맡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당시 전세는 국민당군의 패망으로 기울고 있었으며 이런 와중에서 전세를 뒤엎을 공방으로 모택동을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의 암살 지시가 내려졌다고 나가지마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의 책 마적 일대에 따르면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소화 23년(1948년) 7월 말의 어느 심야 OSS로부터 긴급소집을 받은 나는 OSS의 사무소가 있는 六條公館 에 들어섰다 거기에는 OSS의 제임스 소령과 日高 대좌가 기다리고 있었다 <모택동을 암살하고 싶다> 제임스 소령은 이렇게 말했다."
그 이후 제임스와 히다카 그리고 나카지마 세 명을 중심으로 암살계획이 입안되던 중 국민당 군의 패색은 점점 짙어져 갔고 공산군 측의 포위망은 갈수록 좁혀오는 상황이었고 이 들은 일단 북경이 공산군에 넘어간 후 암살을 실행하기로 계획하였다고 전합니다 그 내용을 보면 북경이 함락디면 공산당 측은 자신들의 승리를 선포하기 위하여 대규모의 군중을 모아 놓고 모택동을 비롯한 공산당 수뇌부들이 천안문 광장에 모습을 나타낼 것이니 그 떄를 틈타 단상을 박격포로 포격하여 수뇌부들을 일소하기로 계획을 진행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북경 함락이 임박해지자 계획을 초기에 입안했던 히다카나 나가지마 등은 북경을 탈출하고 구체적인 계획의 실행은 북경에 남아 있던 야마구치 류이치(山口隆一)라는 일본인과 이탈리아 인 안토니오 리바 등 에 의하여 진행되었고 이 들은 천안문 광장 앞의 다리에 박격포를 숨겨놓고 거기서 단상을 포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1950년 이 계획이 탄로나서 이 들은 중국공안에 체포되어 사형 종신형 등 중형을 선고받은 것으로 이 음모는 무산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북평에 남아 있지 않고 탈출한 것에 대해서 나가지마는 자신은 OSS뿐 만 아니라 국민당 정부군에도 적을 두고 그 관련 업무-특히 일본 구 군 및 특무 기관 요원들과의 관계에 있어- 있었기 때문에 국민당 정부와 같이 나간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 후 대만으로 탈출한 후 대만 경비총사령부 (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도망친 후 대만지역에 선포된 계염령을 집행하던 계엄사령부)에서 거류일본인 담당 부서의 책임자(대략 소교 급 나가지마의 말에 의하면 중교 대우의 소교였다고 함)로 근무하면서 모택동 암살 계획의 실행을 감독하다가 이 임무와 함꼐 다른 특수임무를 실행할 책임을 지고 주일국민당 대표부의 정보장교로 일본에 왔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 후 일본에 온 후 OSS의 연계와는 별도로 당시 GHQ G2 산하의 특무기관에 의해 연금되었다가 이 기관의 에이전트로 활동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나가지마가 일본에서 수행할 목적을 띄고 파견된 또 다른 특수임무란 동아 의용군 혹은 대만 의용군 이라고 불리우는 건으로 당시 구 일본군 고급 장교들을 비록한 구 군인들을 의용군 형식을 빌려 모집하여 국민당 군대를 지원하게 하는 계획이었습니다. 이 대만 의용군 건은 언젠가 한 번 다뤄볼까 하지만 관련자료가 당최 부족하니... 그외 나가지마의 증언에는 다른 재미있는 사실도 많지만 사실관계를 증명하기 어려운 게 많으므로 넘어갑니다)
나가지마의 증언은 흥미롭긴 하지만 그의 주장 에서 몇 가지 사실관계에 대힌 의문이 발견되고 또 과장 여부-니가지마가 설령 OSS나 국부군 기관에 근무했다 하더라도 자신이 말한 것처럼 장교급의 대우를 받고 상당히 깊숙한 곳까지 다룬 인물이었는 지 막말로 저런 기관에서 하급 심부름꾼 역할을 했는지 알 게 뭡니까- 등의 문제로 신뢰성을 부여하기는 어려웠고 이를 입증할 다른 자료도 없었습니다 . 그런데 작년 7월 보도된 모택동 암살에 대한 중국 보도를 인용한 일부 언론 기사들을 보면 여기와 관련된 내용이 나와 있었습니다(링크 참조)
美 1950년 毛澤東 포격 암살 기도 연합뉴스
미국 50년 毛澤東-周恩來 암살기도
당시 이 건에 대하여 교도통신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신중국 탄생의 다음 해인 1950년 국경절 10월 1일에 미국정보기관이 북경의 천안문 망루에 도열하고 있던 모택동 주석을 비롯한 중국지도자를 암살하려고 계획, 이를 미연에 적발한 중국 측에 의하여 주범 격인 일번인과 이타리아 인을 사형에 처한 사건의 경위가 24일 중국 외교부가 공개한 외교문서에서 확인되었다. 중국 미디어에 의하면 , 외교 문서는 사형된 일본인 남성 「야마구치 류이치」씨에 대해 「원래 일본의 특무(스파이) 로 , 46년에 미 특무 기관인 전략정보국OSS의 정보원이 되었다」라고 하고 있다 이 문서에 의하면 , 미 정보기관이 50년 1월부터 암살 계획에 착수해 , 야마구치 씨 등이 준비를 진행시키고 있었지만 , 동씨가 동년 9월에 토쿄의 미군 사령부에 보낸 편지를 북경시 공안국이 입수해 발각.관계자 전원이 체포되어 사건에 사용할 예정이었다고 보여지는 박격포나 피스톨 , 수류탄등이 압수되었다 (교토 통신 2004년 7월 24일)
【北京24日共同】新中国誕生の翌年、1950年の国慶節(10月1日)の際、米情報機関が北京の天安門楼上に並ぶ毛沢東主席ら中央指導者の暗殺を計画、未然に摘発した中国側が主犯格の日本人とイタリア人を死刑にした事件の経緯が24日までに、中国外務省が公開した外交文書で確認された。中国メディアによると、外交文書は死刑となった日本人男性の「山口隆一」氏について「もともと日本の特務(スパイ)で、46年に米特務機関である戦略情報部門の情報員になった」としている。同文書によると、米情報機関が50年1月から暗殺計画に着手し、山口氏らが準備を進めていたが、同氏が同年9月に東京の米軍司令部に送った手紙を北京市公安局が入手し発覚。関係者全員が逮捕され、事件に使う予定だったとみられる迫撃砲やピストル、手りゅう弾などが押収された。(共同通信)[7月24日19時4分更新]
일단 중국 법제만보를 전제한 문히보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귀차니즘으로 대략 옮긴 거라서 오역이 있을 수도 있으니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950년 미국간첩 천안문 포격 사건에 관하여서 이미 민간에 있어서 여러 가지 판본으로 전해왔다. 이제 막 기밀 해제된 외교부 문서에서 이 사건에 관계된 문서들을 손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54년간 밀봉되어 있던 문서는 당시 소수 몇몇만이 알고 있던 사실을 드러내보여준다 關於1950年美國間諜陰謀「炮轟天安門」事件,民間已經有許多版本。日前,從外交部剛剛解密的一批檔案中,人們可輕易看到相關的檔案文件。這份密封了54年的文件揭開了當時一些鮮為人知的史實
미국간첩분자 리안동( Antonio Riva) 馬迪懦(Ma Di Nuo 덕국인) 야마구치 류이치 3명은 일찌기 1950년1월에 10.1 국경절 시 천안문 포격 계획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시 간첩분자들이 천안문을 포격하는데 사용하려고 했던 것은 82mm박격포 한 문이었다. 이 외교부 문서에 근거하면 북경 해방 전 미국특무기관은 /북경에 있던 미국특무기관은 해방 전 이 82 박겨포를 구호물자 속에 숨겨서 리에게 주었다 리는 이 박겨포와 포탄을 자기 집과 마디누오 집에 분산해서 몰래 숨겨놓았다 美國間諜分子李安東、山口隆一、馬迪懦(Ma Di Nuo 덕국인)3人,早在1950年1月間就開始著手準備在「十一」的時候「炮轟天安門」。當時,間諜分子想用來「炮轟」天安門的工具是一門82迫擊炮。據這份外交部檔案記載,美國特務機關在北京解放前夕,把這門82迫擊炮掩藏在救濟物資中交給李安東。李安東又將這門迫擊炮和炮彈分散暗藏在自己和馬迪懦家中
행동계획에 착수한 후 야마구치는 5월에서 7월 동안 천안문에 가서 광장주변의 지형을 측량하곤 했다. 그는 천안문 모양과 주석대를 지시목표로 겨낭한 스케치를 그렸다. 연필로 그린 이 천안문 주변 지형도에는 천안문 주석대가 사격지시목표로 그려져 있었다. 御河橋에 놓여져 있는 화기에서 굵고 검은 포물선 하나가 바로 천안문 성루중앙의 모주석초상으로 뻗어져 향하고 있었다. 定下行動計劃後,山口隆一在5月到7月間,經常親自跑到天安門去測量廣場周圍的地形。9月16日,他繪製了一張天安門的圖樣和向主席台射擊的指示目標。這張用鉛筆繪製的天安門地形草圖,畫出了射擊天安門檢閱台的指示目標:從御河橋上放的一滅火機上,一條又粗又黑的拋物線直指天安門城樓中央的毛主席畫像。
9월 26일 야마구치가 토쿄저령군사령부에게 발송한 정보에서 음모의 계획가능성을 상세하게 평가하면서 <돌연히 사정이 생거 난관이 생기고 만약 저렇게 된다면 야마구치는 도망가야 하며 다른 수가 없다> 만약 이 음모가 실현 되지 않고 또 폭로되지 않는다면 , <그렇게 되면 즉시 빠져나갈 것을 계획한다, 그러나 이런 중요한 계획을 결단코 포기할 수 는 없기에 임무를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같은 건 바보스러운 일이다. 그러니 마음 놓기를 바란다> 9月26日,山口隆一向東京美國佔領軍總部發出的情報中,詳細估計了這一陰謀計劃的可能性,「事情很突然,裏面是有枝節的,如果是那樣的話,山口隆一要逃跑,別無他招。」要是陰謀不能實現,而又不暴露,「那樣的話,打算立刻躲避起來,但是決不能放棄這個重要任務,如把使命放下的等等說法是笨的計劃,所以這點請安心。」
야마구치가 토쿄에 보낸 편지는 북경시 정사처에 의해 입수되었다. 이 편지가 보내어지는 곳은 일본 토쿄도 시부야 구 神泉마치 20번지 7호 제일선 C관리실로 비밀검사를 통하여 서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CIC 본부: 산 소화기를 10월 1일에 보내기로 정헀음,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어 가고 있음. 열렬히 안부를 전함(안부에 열렬하다는 말을 쓰는 건 좀 이상하지만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어 그대로 옮깁니다). 然而,山口隆一寄往東京的郵件被北京市公安局偵查處截獲了。信件的投送地址:日本國東京都澀谷區神泉町20番地7號第一綠C管理室。經過秘密檢查,信件的內容是:CIC總部(日本東京美國盟軍司令部CIC情報處--編者註):所購滅火機定於10月1日發貨。一切按既定計劃進行。致以熱烈的問候!
북경시 공안국 2처는 즉각 경각심을 느껴 야마구치 주변에 대해 비밀 감기와 조사를 진행하여 재빨리 저 거대한 외국간첩조직과 그 음모를 발견해냈다. 9월 26일 양 주범 과 그외 다른 공범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北京市公安局二處立刻警覺起來,圍繞山口隆一進行了嚴密的監視和偵查,很快發現了這個巨大的外國間諜組織及其陰謀。9月26日,兩名主犯李安東和山口隆一及其他案犯全部落網
외교부 비밀문서에 의거하면 시 공안국은 리안동 집에서 야마구치가 그린 천안문 주변 지형도 82 밀리 박격포 한 문 권총 두 정 수류탄 8개 포탄과 그 자탄 650여발 독약 두개? 그리고 특무신원 서류및 다량의 중국 군사 정치 경제 정보초고를 발견했고 이들 정보중에는 아군의 부대 번호 및 지휘관 이름 지지 자동차 상표들도 딸려져 있었다 據此份外交部解密檔案記載,市公安局從李安東等人家中搜出山口隆一繪製的炮轟天安門圖樣底稿一張、82迫擊炮一門、手鎗兩把、手榴彈8枚、炮彈和各種子彈650多發、毒藥兩件,還有特務證件及大量的中國軍事、政治、經濟的情報底稿,有的情報上還附有我軍的部隊番號和領導人姓名、地址、汽車牌號等。
수개우러 동안의 거듭된 신문 끝에 51년 8월 17일 주범 는 법에 따라 사형을 선고받아 바로 천교 형장으로 호송되어 총살이 집행되었다. 공범 魏智 亨利 (We Zhi. hengLI 이 거 가차 표기라서 원래 이름을 모르겠음 ) 甘納斯(Gan Na Si) ( 이상 프랑스인)馬迪懦(Ma Di Nuo)、哲立(Zhe LI) 이상 독일인、마 신 칭馬新清(중국인) 등은 무기징역과 유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아는 바로는 이들은 형기만료 후 우리정부에 의해 국외추방되었다고 한다 經過數月的反覆審訊,1951年8月17日,該案主犯李安東、山口隆一被依法判處死刑,立即押往天橋刑場執行槍決;同案犯魏智.亨利、甘納斯(德國籍)、馬迪懦、哲立(德國籍)、馬新清(中國籍)等被分別判處無期徒刑和有期徒刑。據悉,他們刑滿後被我國驅逐出境
리안동 ( A ntonio Riva ) 이탈리아 인 1896년 상하이 생. 1948년 그는 전 북평 영사관 주재 미국무관 包瑞德(Bao Rui de) 지휘 하에 정식으로 특무간첩활동을 시작했음. 李安東,意大利人,1896年生於上海。1948年,他開始正式在前美軍駐北平領事館上校武官包瑞德的領導下進行特務間諜活動。
야마구치 류이치 전 일본특무 출신으로 1946년 정식으로 미국특무간첩기관 전략정보처 OSS 에 가담하여 agent가 됨. 1946년 5월 북경에 있던 프랑스 어 서관 대리상인 We Zhi. hengLI의 소개로 Liva를 알게 되어 그의 지휘하에 정보수집을 담당. We Zhi는 서점 경영을 커버로 하여 리바에게 정보를 제공 하고 야마구치의 간첩활동에도 커버를 제공 Ma Di Nuo는 천주교 자의 주교(아마 주교의 보라빛 복색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 로 사건 전후에 Riva와 Bao Rui de에 정보를 제공하고 또 리바를 위하여 무기를 숨겨주고 정보 초고를 비밀리에 보관했음 山口隆一原為日本特務,1946年正式參加美國特務間諜機關戰略情報處,為情報員。1946年5月在北京法文圖書館經理魏智.亨利的介紹下認識李安東,並在李的指示下搜集情報。魏智.亨利借開書店作掩護,為李安東提供情報,並掩護山口隆一進行間諜活動。馬迪懦為天主教紫衣主教,先後給包瑞德、李安東等人供應情報,並為李安東窩藏軍火武器及隱匿情報底稿。 (摘自《法制晚報》)

당시 범인 관계도

야마구치 류이치가 작성한 천안문 주변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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