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 암살 사건 2또 한 인민일보사에서 발행하는 잡지인 대지에는 이 사건에 대해 보다 자세히 기술되어 있는 데 이를 보면
최근 외교부가 비밀해제한 외교문서 중에 있는 <미국특무간첩이 무장폭동 음모를 꾸며 중화인민공화국을 위해하려 했던 데 대한 북경시인민 검찰서 기소서> 와 <중국인민해방군 북경시 군사관제위원회군법처 판결서>에서 공화국 탄생 1주년국경절 전야 인민정부가 리안동을 수괴로 하는 미국간첩조직을 성공리에 적발하여 천안문 광장을 포격하여 했던 테러 계획을 분쇄했던 역사적 장면이 새로이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在外交部档案馆最近解密的外交档案中,有一份《北京市人民检察署对美国特务间谍阴谋武装暴动危害中华人民共和国案起诉书》和《中国人民解放军北京市军事管制委员会军法处判决书》,将共和国第一个国庆节前夕,人民政府成功破获以李安东为首的美国间谍组织,粉碎其炮轰天安门恐怖计划的历史画面重新呈现在人们的面前。
국경절을 불과 4일 앞두고 박격포를 압수 起获迫击炮时距国庆庆典只剩四天
북경 해방 전 미국특무기관은 , 많은 간첩 특무들이 잠복시켜 배치해 놓고 이들에게 간첩활동 도구와 무기 탄약을 주고는 정보 탐사와 파괴활동을 위한 기회를 노리길 획책하였다.이탈리아 인 李安东(Antonia Riva)는 바로 이런 잠복 간첩 조직 두목의 한 명으로 그의 표면상의 신분은 천진 老世昌 공사 북경 대리인이었다.北京解放前夕,美蒋特务机关安排了大批间谍、特务潜伏下来,为他们配备了间谍工具和武器弹药,妄图伺机刺探情报,从事破坏活动。意大利人李安东(Antonia Riva)就是潜伏下来的间谍组织头目之一,他的公开身份是天津老世昌公司北京代理人
미국특무기관은 해방군 북경 진주 전에 리의 간첩조직을 무장시키기 위하여 STOKES82 박격포 한 문과 포탄을 미국측에서 제공한 소위 구호물자 속에 넣어 리에게 주었다. 리는 이 중형 화기를 분해하여 , 자기와 또 다른 간첩분자인 의 집에 나누어숨겨 놓고 이 걸 어떻게 사요할 건지 내내 궁리했다 1950년 1월 어느 날 이는 북경동문민항 불어도서관에서 목록편집자 신분으로 잡졳하고 있던 일본인 특무 야마구치 류이치(중국식 이름으로는 류)가 살던 북경 동성감우호동을 17호원北京东城甘雨胡同乙17号院에 그를 찾아갔다. 리는 야마구치에게 그가 여기에 박격포 한문을가지고 있고 천안문의 중국인민정부개회식을 기다렸다 사용해볼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야마구치는 즉각 이 건에는 약간의 위험이 있다는 걸 느꼈다 그러나 리가 아주 단호한 태도로 야마구치를 복돋우길 "물론 위험도 있겠지만 위험을 무롭써야 만 댓가가 있는 법"라고 하였다.
야마구치가 훗날 설명하길" 나는 소련공산당의 사상을 적대시하고 있으며 중국공산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대했다 리의 박격포 이야기를 알게되자 위험하지만 쏘아보자고 생각했다"고 하였다
1950年1月的一天,李安东把以目录编辑员身份潜伏在北京东交民巷法文图书馆的日本籍特务山口隆一(化名刘逸)找到他在北京东城甘雨胡同乙17号院的家里。李安东告诉山口隆一,他这里存有一门迫击炮,可以“等中国政府在天安门开会时试一试”。山口隆一开始还觉得这样干有点冒险。但李安东非常坚决,他给山口隆一打气:“可以冒险,只有冒险才有代价。”山口隆一后来交代称:“我有仇视苏联共产党的思想,对中国共产党也同样的敌对。我知道李安东的迫击炮,我想做冒险的射击。”
둘은 몰래 모의하여1950년 10월 1일 신중국건국 1주년 기념식 떄 천안문 성루를 포격하여 모주석과 중앙인민정부 지도자를 모살한다는 안을 세우고 그들의 다른 정보 루트를 통해 이를 먼저 특무조직 日本东京日洲株式会社에 보내고 거기서는 다시 이를 도쿄의 점령군총사령부에 건넀다 이 계획 안에서 이들은 이 커다란 도전은 착후해야 하는 것이며 지금에 있어 상대측 (우리 측을 가리밐. 즉 중국 측을 지칭)에 대한 통쾌한 저항이 될 것라고 말하였다 俩人经过密谋,草拟了一份趁10月1日新中国成立一周年庆祝大会时,炮击天安门城楼,谋杀毛泽东主席及中央人民政府其他领导人的计划报告,通过他们的情报管道,先寄到特务组织“日本东京日洲株式会社”,再由该会社递交给日本东京美国占领军总部。在该计划中,他们说要进行一次大的“挑战”,宣称“现在正同对方(指我方)很痛快地对抗”。
계획은 재빨리 승인을 얻었다 5월부터 리와 야마구치는 박격포 사격 계획의준비를 시작하였다 이를 위해 야마구치는 여러 번 천안문에 가서 광장주변 지형을 측량하고 그 결과를 지도로 그렸으며 거기에는 박겨포의목표와 모주석이 군중대오를 검열할 떄의 위치가 나타나 있었다 이 그림은 나중에 우리측 경찰에 의해 압수되었다 그림의 정 중앙에는 천안문 성루가 았고 성루위에 있는 작은 사람은 우리측 지도자의 위치를 나타냈고 포탄의 사격방향을 나타내는 포물선 하나는 금수교에서 바로 성루부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기에는 또 한 일본어로 된 설명과 야마구치의 서명도 나타나 있었다. 이 스케치는 천안문을 포격하려 했던 계획을 의심의 여지 없이 드러내 보여준다. 计划很快获得了批准。从5月份开始,李安东和山口隆一开始进行炮轰的准备活动。按照计划,将由山口隆一开炮。为此,山口隆一多次跑到天安门广场,测量了广场周围的地形,将测量结果绘制成地图,上面注明了炮击的目标和毛泽东主席检阅群众队伍时的位置。该图底稿后来被我警方缴获:图的正中是天安门城楼,城楼上一个小人代表我领导人的位置,一条代表炮弹走向的抛物线从金水桥直指城楼顶部。图上还有用日文做的说明和山口隆一的签名。草图把他们炮轰天安门的计划暴露无疑。
9월 16일 야마구치는 완성된 지형도를 토쿄로 부쳤고 포격게획의 실시방안을 보다 국체적으로 수립했다 체포된 후 야마구치는 구술에서 "나는 집회시 정부요인들이 모두 천안문에 오는 걸 알고 있었고 10월 1일은 중국의 국경절로 나는 반드시 여기서 행사가 열릴 것으로 생각해서 나는 동맹군 촐부(연합군 총사령부)에 그림을 그려 보냈다 즉 그들에게 천안문의 모택동이 위치한 목표를 알린 것이다"라고 하였다 9月16日 ,山口隆一将绘制好的图纸寄往东京,并加紧制定炮轰的具体实施方案。山口隆一在被捕后的口供中供认:“我知道集会时政府要人都到天安门来,10月1日是中国的国庆日,我想一定在这里开会,我给东京盟军总部画这个天安门,就是告诉他们天安门毛泽东目标的位置。”
9월 26일 그들은 1포격게획의 구체적 실시방안을 토쿄에 보냈고 여기에는 성공가능성과 실행 후 도주계획에 대한 평가가 담겨 있었다 일이 돌연히 장애가 생겨서,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야마구치는 도망쳐야 하고 别无他着. 만약 음모가 달성되어 또 들키지도 않으면 ( 이 구절은 앞에 인용한 법제만보-문희보 기사에는 如果阴谋不实现而又没暴露라고 되어 있는 데 여기에는 如果阴谋实现而又没暴露라고 되어 있습니다. 전자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또 이것- 아마 자신들의 관여 건을 의미하는것으로 보임- 이 폭로되지 않는다 라는 의미고 후자는 음모가 달성되고 또 한 그들의 관여가 드러나지 않는다면 이라는 의미인 데 뒤 구절에 음모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가겠으니 안심하라는 말이 나오는 걸로 봐서 아마 후자 쪾이 맞지 않나 생걱이 듭니다 ) 바로 숨을 계획이다 그러나 이 중대한 임무를 절대 포기할 수 없으니 이 임무를 포기하하고 하는 건 바보 같은 생각이다. 그러니 마음 놓고 있기 바란다 9月26日,他们将实施炮轰的具体方案寄往东京,方案估计了计划实施的可能性和实施后的逃跑计划,内称:“事情很突然,里面是有枝节的,如果是那样的化,山口隆一得要逃跑,别无他着。”如果阴谋实现而又没暴露,“那样的话,打算立刻躲起来,但是绝不能放弃这个重要任务,如把使命放下的等等说法是笨的计划,所以这点请放心。”
리와 그들이 상상할 수 없었던 건 그들 자신들이 주도면밀한 것으로 여겼던 테러 계획이 일찍부터 우리 측 손 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들이 조용히 저명군 사령부의 최후지령을 기다리고 있을 떄; 그들이 도쿄에 보낸 정보는 이미 우리 측 공안원의 손에 들어와 있었다 李安东他们没有想到的是,他们自以为周密严谨的恐怖计划,早已在我方的掌控之中。就在他们静等着占领军司令部的最后指令的时侯,他们寄往东京的情报已经到了我公安人员的手中
1950년 9월 26일 신 중국 성립 1주젼 기념일을 불과 4일 앞두고 북경의 크고 작은 거리는 축제 분위기로 차 있었다. 그날 북경시 공안국 북경시군관회 인원일행이 돌연 북경 감우호동甘雨胡同을 봉쇄하고 신속하게 17호의 리 집에 들이닥쳤다 리는 돌영히 나타난 공안과 인민해방군 전사들에 놀라 정신이 얼떨떨해졌다 1950年9月26日,距离新中国成立一周年还有4天时间,北京城的大街小巷已经呈现出节日的喜庆气氛。这天,北京市公安局、北京市军管会一行人员突然封锁了北京甘雨胡同,并迅速冲进乙17号院李安东的家。李安东被突然出现在面前的公安干警和解放军战士吓呆了
동시에 옆에 있는 16호에서 야마구치 역시 전사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공안은 리에게 체포장을 읽어주고 곧 집안을 수색하여 바로 82 박겨포 권총 두 정 포탄 자탄 494발 수류탄 8발 박겨포 탄두와 신관 등 각종 무기부품 273점 열성 독약 두 봉지 그외에도 중앙지도자 인민정부 각 기관 각 민주당파 책임자들의 주소 차량번호 등을 비롯하여 자료들을 기록한 정보 카드및 보고서 1천여건도 발견되었고 이 중에는 야마구치가 그린 천안문 광장 포격 게획 스케치도 있었다 与此同时,在旁边16号院内,山口隆一也被解放军战士抓获。公安干警向李安东宣读了逮捕令,并立即对房间展开搜查,当即起获了82迫击炮一门,手枪两支,迫击炮炮弹、子弹494发,手榴弹8枚,迫击炮弹头和引信等各种武器零部件273件,烈性毒药两包。此外还有包括记录着我中央领导人、人民政府各部委、各民主党派负责人住址、汽车牌号等资料在内的情报卡片和底稿一千多件,其中还包括山口隆一绘制的那张炮轰示意图。
이런 물증 앞에서 리는 순순히 두 손 들고 시인했다 이로써 반년에 걸쳐 획책된 테러 게획은 철저히 부서져 버렸다 국경절을 불과 4일 앞두고 있을 떄였다 在这些物证面前,李安东乖乖地举起双手。至此,一个策划了半年之久的恐怖计划彻底破产。此时,距离新中国成立一周年庆典还有4天。
리안동( Antonio RIva)가 간첩이력 ( 짐작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이 햏 1차 대전 당시 이탈리아 측 에이스 중 한 명이었던 Antonio RIva가 맞습니다)
체포 당시 55세의 리는 1896년 상하이에서 태어났고 10살에 다시 이탈리아로 이주해서 거기서 자랐으며 그 후 이탈리아 공군학교에서 수학하였다. 당시 이타릴아에서는 파시즘이 세력이 왕성할 떄라 리는 학교에서 파시즘 교육을 받아 열렬한 파시스트 광신자가 되었다. 1919년 23세가 된 리는 공군학교를 졸업한 후 이탈리아 정부의 항공사절단에 가입하여 다시 중국에 오게 되었다. 그가 다시 중국 땅을 밟을 무렵 그는 이미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던 아이에서파시스트 비밀결사의 사명을 띤 간첩분자로 변해 있었다 3년 후 리는 천진에서 무기 무역을 위주로 하는 "意亚 (Yiya) 공사 를 열어 북양군벌 曹锟等에게 무기를 공급하는 한 편, 다른 한 편에선 상인 신분 위장을 이용하여 정보수집활동에 종사했다 그 다음에는 그는 파ㅣ시스트 당 북평 지부를 조직하여 스스로 그 지부장이 되었다. 장개석이 내전을 수행하는 걸 돕기 위하여 이탈리아 파쇼 두목 무솔리니 (墨索里尼 Mo Suo Li NI)의 사위인 주상해 이탈리아 총영사 치아노 (齐亚诺 Qi Ya Nuo) 소개를 통해 리는 "(주중) 이탈리아 공군 지도단?고문단을 창설하여 그 비서장을 맡았고 장개석을 위해 공군 대원들을 훈련시키고 또 장새석이 혁명의 근거지로 진공하는 데 사용할 목적으로 이타릴앙로부터 200기의 항공기를 구입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7.7사변(중일 전쟁의 시발점이 된 노구교 사건을 지칭) 이 후 리는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 특무기관 "북지나방면군사령부 보도부 고급특무
日高富明와 같이 결탁 갑자기 일신하여 당시 <북경시사보>의 기자로 변신하여 화북 각지를 돌아다니며 일본군을 위하여 정보를 수집하였다 . 항일 전쟁 승리 이후 중국공산당의 혁명역량은 계속적으로 증대되었다. 리는( 이에) 적그적으로 반공 활동을 전개키 위하여 미국의 발 아래로 들어갔다. 1948년 11월 11일 리는 미국북평영사관 무관에게 편지를 써서 다음과 같이 전했다 : " 지난 몇 년전부터 우리가 몇 번 의견을 교환하는 중에 내가 일관되게 반공을 주장해왔다는 걸 당신이 증명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습니다 공산주의 문제는 이미 크고 광범위한 중요성을 가진 문제이고 아마 전쟁을 통해서 겨우 해결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반공진영의 공인된 맹주인 미국을 위하여 힘쓰기를 무척 바라고 있습니다. 북경 해방 직전 리는 천진 老世昌 공사 북경대리인의 위장신분으로 북평에 와서 간첩망을 구축하고 간첩 파괴 활도을 전개했다 그 간 그의 간첩망에는 한 첩보원이 들어왔으니 그가 바로 야마구치 류이치이다
李安东的间谍生涯
被捕时的李安东55岁,他1896年生于中国上海,10岁时随其家人回到意大利,成年后进入意大利空军学校读书。当时意大利法西斯主义思潮已经兴起,李安东在学校接受了法西斯主义教育,成为一名狂热的法西斯主义信徒。1919年,23岁的李安东从空军学校毕业后,参加了意大利政府的“航空使节团”重返中国。当他重新踏上中国土地的时侯,已经从当年那个会讲一口流利汉语的稚童,变成一个担负法西斯主义秘密使命的间谍分子了。3年后,李安东在天津开办了以军火贸易为主的“意亚公司”,一边为北洋军阀曹锟等提供军火,一边以商人身份为掩护,从事搜集情报的活动。随后,他组建了法西斯党北平支部,自任支部长。为了帮助蒋介石打内战,经意大利法西斯头目墨索里尼的女婿、意大利驻上海总领事齐亚诺介绍,李安东组建了“意国空军指导团”,担任秘书长,为蒋介石训练空军人员,并帮助蒋介石从意大利购买了200架飞机,用于进攻革命根据地。“七七事变”后,李安东同侵华日军特务机关“北支那方面军司令部报道部”高级特务日高富明勾结在一起,摇身一变,成为当时《北京时事报》的记者,流窜于华北各地,为日军搜集大量情报。抗日战争胜利后,中国共产党领导的革命力量不断壮大。为积极反共,李安东投身到美国脚下。1948年11月11日,李安东写信给美国驻北平领事馆武官,信中说:“从几年来我们多次的交换政见中,我相信你能证明我一贯的反共主张。共产主义问题已具有广大的重要性,或许只能用战争去解决。我很愿意为反共阵营公认的盟主美国效劳。” 北京解放前夕,李安东以天津老世昌公司北京代理人的身份为掩护来到北京,建立间谍组织,开展间谍破坏活动。此间,他网罗了一批谍报人员,其中就有山口隆一。
야마구치 류이치 역시 공산당을 극도로 적대시하는 숙련된 특무였다 그는 1938년 일본해군부( 해군성?)임명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류이라는 중국이름으로 , 화북항업총회 북경판사처 부처장의 위장신분을 띄고 화북연해의 선박과 항일유격대에 대한 정보를 전문적으로 수집했다. 1946년 1월 야마구치는 미국 특무기관 전략정보국(OSS)에 가담하여 OSS 임명으로 두 달 뒤
국민당 국방부 제2청 정보기관(대외 명칭은 국제문제연구소)의 소교 급 연구원이 되었다 1948년 11월 북평 해방 떄 야마구치는 장기 잠복의 명을 받아 그떄부터 이름없는 도서목록편집자로 동문민항 대기창에 자리잡은 불어 도서관에 왔다 북평 해방 후 야마구치는 그 위장신분을 이용하여 중앙인민정부수장과 전국정협대표의 이름 약력 주소 자동차 번호 등에 관련 정보를 대량으로 미국 정보망을 통하여 일본에 있는 미국점령군 총사령부에 전달하였다 山口隆一也是一个极端仇视共产党的老牌特务。他1938年受日本海军部委派来到中国,化名刘逸,担任日伪华北航业总会北京办事处副处长,专门搜集有关华北沿海的船舶及抗日游击队的情报。1946年1月,山口隆一加入美国特务机关“美国战略情报局”,受该局委派,两个月后,他成为国民党国防部第二厅情报机关(对外称“国际问题研究所”)的少校研究员。1948年11月,北平解放在即,山口隆一接受长期潜伏的任务,从那时起,位于东交民巷台基厂的法文图书馆里来了个默默无闻的“图书目录编辑员”。北平解放后,山口隆一以此为掩护,将大量有关中央人民政府首长和全国政协代表的姓名、简历、住址、汽车牌号等情报,通过美国的情报网,传送到了在日本的美国占领军总部
정의의 심판 正义的审判
리와 야마구치를 체포한 후 우리 경찰은 진상을 추적해나가 그등릐 간첩망을 일거에 떄려부수어 연이어 간첩분자 马迪儒(意大利人,潜伏身份:天主教易县地区紫衣主教)、魏智(法国人,潜伏身份:法文图书馆经理)、哲立(意大利人,潜伏身份:教员)、甘斯纳(德国人,潜伏身份德国宝世公司北京代理人)등을 체포하였다 그외 간첩조직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물자를 숨겨준 중국안 马新清 역시 체포되었다 李安东和山口隆一被捕后,我警方顺藤摸瓜,一举捣毁了他们的间谍网,先后将间谍分子马迪儒(意大利人,潜伏身份:天主教易县地区紫衣主教)、魏智(法国人,潜伏身份:法文图书馆经理)、哲立(意大利人,潜伏身份:教员)、甘斯纳(德国人,潜伏身份德国宝世公司北京代理人)等抓获。此外,还有一个为间谍组织传递情报、藏匿物品的中国人马新清也一并落网。
1951년 8월 17일 오후 주국해방군 북경시군사관제위원회법정처내에서 리 등 7명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다 1951年8月17日下午,在中国人民解放军北京市军事管制委员会军法处内,开始对李安东等7名罪犯进行审判
북경시 인민검찰서검찰장 뤄 루이 칭(;罗瑞卿 맙소사 뭐 이때는 공안과 군이 섞여있을 때였으니..) 이 공소인이 되어 기소서를 낭독하였다 作为公诉人,北京市人民检察署检察长罗瑞卿宣读起诉书
북경공안국은 50년 9월부터 중대한 무장 폭동음모죄에 종사한 미국정부특무간첩 리 야마구치 등 미국 특무기관 간첩을 감시하여 곧 같은 해 9월 26일에 먼저 를 체포하므로써 무기류 정보 등 대범죄의 증거를 압수했다 北京市人民政府公安局于1950年9月,侦悉美国政府特务间谍李安东、山口隆一等从事重大的阴谋武装暴动罪行,乃于同年9月26日首先将李安东、山口隆一等加以逮捕,搜获军火武器、情报等大批罪证……
기소서는 24가지 항목에 달하며 리의 대량범죄행위를 열거하고 있다 명학한 증거가 있어 확정된 이 사안에 리 등은 궤변을 늘어놓을 여지도 없이 자신들의 죄에 대한 후회를 표시하고 군법처 심판을 받아들이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起诉书长达24页,列举了李安东等人的大量犯罪事实。铁证如山,李安东等没有狡辩的余地,只能表示对自己所犯罪行的忏悔和愿意接受军法处的审判
마지막으로 중국인민해방군 북경시 군사관제위원회 군법처 처장 王斐然이 이 7명에 대해 선고하길 最后,中国人民解放军北京市军事管制委员会军法处处长王斐然对7名罪犯进行宣判:
피고 리 는 미국정부를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무장폭동을 획책했으며 국가원수와 기타 중앙인민정부 지도자를 모살하려고 했다 두 피고를 공히 사형에 처한다 被告李安东、山口隆一为美国政府搜集我国情报,策划武装暴动、谋杀我国家元首及中央人民政府其他首长。两被告均处死刑
피고 告马迪儒는 국민당 비적 조직특무 조직이 무장 하여 해방구를 파괴하기 위하여 , 미국정부가 우리 정보를 수집하기 위하여 또 한 폭동 음모를 맡은 리를 위하여 무기를 숨겨주었으며 이에 무기징역에 처함 被告马迪儒为国民党匪帮组织特务武装,破坏解放区,为美国政府搜集我国情报,并为阴谋暴动充当美国政府特务的李安东隐藏军火武器,处无期徒刑
피고 魏智는 우리 정보를 수집하여 미국정부에 제공하고 폭동음모를 꾸민 를 은닉했으며 이에 징역 10년에 처한다 被告魏智搜集我国情报,供给美国政府,窝藏阴谋暴动充当美国特务的山口隆一,处徒刑十年。
선고이후 全副武装전부무장?한 해방군 전사들이 바로 리 , 야마구치를 天桥행장으로 끌고 가서 사형을 집행했다 호송차가 왕부정 대가王府井大街 전문대가前门大街를 따라 天桥로 나아갔다 대로를 따라 양 특을 가득채운 일방인 군중들에게서 타도 제국주의 반혁명을 단호하게 진압하라앚 같은 구호가 계속적으로 터져 나왔다 宣判之后,全副武装的解放军战士立即将李安东、山口隆一绑赴天桥行场,执行死刑。刑车沿王府井大街、前门大街向天桥开进。沿途街道两旁挤满了老百姓,人群中“打倒帝国主义!”、“坚决镇压反革命!”等口号此起彼伏
오후 5시 곧 두발의 총소리가 청량-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이 건 원문에 그렇게 나와 있으니-하게 들려왔고 리와 야마구치는 죄많은 그들의 인생을 마감하였다 下午5点整,随着两声清脆的枪声,李安东、山口隆一结束了他们罪恶的生命 대지 2004년 16호 (“炮轰天安门”未能得逞的恐怖计划 2004年 第十六期)
이 기사들을 보면 북경 함락 전부터 잠복하여 공산당 점령 이후 기회를 노려 천안문 광장 박격포 포격을 기획헀다는 점이나 이를 위한 지형도 작성 OSS의 개입 일본의 점령군 사령부(GHQ)의 관여 국제문제 연구소 같은 기관이나 日高富明 같은 인물들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걸 로 봐서 앞서 말한 나가지마의 증언 진술과 상당히 부합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들 내용을 조합해 보면 리바를 지휘했던 북평주재 영사관 무관 대령 Bao Rui de(包瑞德)이 실제 OSS현지 책임자이고 나가지마가 언급한 제임스 소령이나 나가지마가 대략 이 라인에 속해 있던 게 아닐 까 하고 여겨집니다. 리바와 日高 대좌와의 관계도 언급되어 있어 역시 나가지마 진술과 부합되는 면을 보여줍니다. 또 한 야마구치가 OSS와 관계를 맺고 국제문제연구소에서 근무했다는 내용도 나오는 데 이 역시 나가지마가 진술한 OSS_ 국제문제연구소- 국방부 제2청의 관계와 맞아 떨어져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저 야마구치 류이치 라는 인물은 전 관동군 산하 대소 특무기관인 하얼빈 특무기관장을 지낸 전 육군 중장 시오텐노부다카(四王天延孝)의 사위라고 하더군요. 무슨 가업도 아니고..)
뭐 공산주의 국가의 재판과 판결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지만 위의 나가지마 증언과 비교해 볼 떄 대략 가해 계획자와 피해 대상(예정)자의 진술이 맞아 떨어지는 셈이니 이 정황에 대한 신뢰성-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도-이 어느 정도는 입증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 증언과 기사들을 봐도 여전히 부족하고 당시 상황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기엔 너무나 미흡하고 그 신뢰도 역시 완벽하게 검증된 게 아니기 때문에 부족하거나 의문나는 점이 많습니다 이와 관련된 몇 가지 사항들을 들자면
첫 쨰로 OSS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트루먼 대통령의 명령에 의하여 해체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데 나가지마 증언이나 위 기사들에서는 여전히 OSS가 계획을 주도한 것으로 나타나 있어서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이에 대해서 한 가지 생각해볼 건 비록 OSS중앙 조직은 해체되었어도 현지 조직은 특히 해당 지역 주둔군 사령부와 연계해서 계속 활동하지 않았을 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유럽 같은 경우는 47년에도 일부 점령지에서는 OSS 활동이 계속되었다고 하니 아마 중국 쪽에서도 비슷하게 OSS간판은 내걸지 않더라도 국민당 지원의 맥락 속에서 현지 활동은 계속 되었고 같은 맥락에서 북경이 함락한 뒤에도 일부 agent들은 저거 언급된 것 과 같이 현지에 남아 있지 않았을 까 합니다 ( 사실 OSS 가 해체된 후 조사 분석 기능은 국무성에 비밀 정보기능은 축소된 체로 육군성에 이관되어 SSU-Strategic Service Unit라는 이름으로 축소되어 남아 있었는 데 이와도 관게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두 번 째는 위에 언급한 모택동 암살건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 건이 어느 정도 수준에서 기획되고 승인되었는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됩니다 일단 저 증언이나 기사들에 따르면 지역 OSS 지국과 국민당 특무기관들이 주로 관련된 것으로 국공내전 말 패색이 짙어진 전황을 뒤엎기 위한 마지막 발버둥 정도로 보여지고 따라서 현지 기관들이 국부군 세력과 결탁하여 일을 춪니하였다 그런 식의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저러한 건을 단순히 현지 주둔군 급에서 추진할 수 있었는 지 저런 건에 대하여 워싱턴이 개입했을 가능성은 없었는 지 -주도적인 게획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사안의 인지나 승인에 있어서라도- 같은 점이 의문스럽습니다 . 특히 국민당 패망 이후 나온 중국 백서나 그후 국민당 정부에 대한 미국의 태도 등과 같은 상황을 볼 때 패전이 확정된 뒤에도 저런 건으로 판을 뒤엎으려는 시도에 대해서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 런지, 저런 계획이 보고라도 되었을 런지 여부가 궁금해집니다 물론 워싱턴 차원이라고 해도 군부나 육군성 과 국무성 같은 각 부처별로 저 건에 대해여 견해 차를 보였을 수도 있으니 문제는 더욱 복잡하군요. 이와 관련해서 위 증언 기사들을 볼 떄 약간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게 시기의 문제가 보입니다. 나가지마의 증언에는 북경 함락 직전부터 이를 예측하고 상당히 오래전(1948년) 부터 계획을 추진한 것으로 나타나 있는 데 위에 인용한 중국 측 기사에선 리바와 야마구치 두 사람이 50년이 되어서야 일을 꾸며 상부의 승인을 받아 계획을 진행시켜 나간 걸로 되어 있어 58~50년간 약 2년간의 차이가 보입니다. 나가지마의 증언에 따르면 이 지시를 받은 게 48년 으로 나와 있으니 꽤 간격이 크게 생깁니다. 이 2년을 준비기간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역시 위 기사의 언급만 보면 본격적인 준비에 나선건 50년 5월부터라고 하니 그 동안의 공백이 보입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이 동안의 미국의 대중 정책이 국민당 정권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중국에 대해 소극적 관망을 취하는 자세로 전개된 탓에 이러한 공작의 계획및 실행에 제동이 걸렸었다가 50년 중반 미국의 대중정책이 다시 반공 쪽으로 선회하면서 비로소 이 계획이 진행될 여건이 마련된 게 아닐 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 동안에도 북경에 잠복해있던 agent들에 대한 지원 연락은 계속 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주로 국민당 기관들과 밀착한 현지 지부나 주둔군과의 연계 속에서 이루어진 게 아닐 까 합니다.
현지 기관 주둔군이 주가 되지 않았나 하는 관점에서 볼 떄 흥미로운 점은 저 기사에서도 나와 있듯이 실행단계에서는 도쿄의 GHQ가 주도권을 맡았다는 점입니다. 이는 국민당 과 연계되어 활동했던 현지 주둔군과 OSS 지국이 장개석이 대만으로 철수하면서 , 미국이 손을 뗴자 더 이상 이 전과 같은 방식으로 지원하기 어려워지자 자연히 이 계획의 중심이 당시 극동을 관할하게 있었던 GHQ족으로 넘어간 게 아날 까 합니다 ( 물론 이 시기에는 OSS의 후계기관이 창설되긴 헀지만 해당 기관은 조직 구성과 역할 설정에 있어서 내부적으로 정비가 덜 된 상태였고 또
이 기관 초기의 활동의 중심은 주로 유럽에 맞추어져 있었고, 또 OSS및 후계기관과 맥아더 GHQ 와의 갈등 대립 때문에 초기에는 이 기관의 극동 내 활동은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관련된 나가지마의 증언을 인용하자면
"대만에서는 계획을 실행하지 못해서 일본으로 가는 편이 좋다고 해서 재스퍼(日高기관의 일원이었던 미국 소령 아마 OSS 로 추정)가 국방부를 움직여 국민정부주일대표부의 정보장교라는신분으로 일본으로 전근하게 되었다. 일본서 모택동암살과 대만모병의 두 가지 계획을 이행하라는 임무였다. 암살계획은 OSS 모병계획은 국민정부였다
이 떄 재스퍼 소령은 나가지마에 <이 것만은 명심하도록>라고 말했다 <일본에는 맥아더가 첩보기관을 만들고 있는 것 같지만 , 당신은 워싱턴에 직결되는 OSS기관원이기 떄문에 맥이 무슨 말을 해도 들을 필요가 없고 임무에 관계 된 것은 절대 비밀을 지키도록> 라고 말했다 "
그러나 1949년 8월 14일 억류선 日本丸을 타고 사세보에 도착함과 동시에 나가지마는 캐논기관 ( G 2 부장 윌로비가 조직한 특별첩보기관 전후 저령기 일본내 국내 정치 개입및 각종 의혹.테러 사건에 관여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특히 카노야 납치사건으로 악명높음.)의 2세 장교에 연행되어 우선 빌딩에 감금되어 그 후 캐논기관과도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보다 먼저 귀국한 日高富明 는 日高기관을 도쿄에 다시 재건하여 캐논기관을 위하여 대 중 첩보활동을 전개하였고 나가지마 자신 또 한 여기에 가담하게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증언에서 보면 대만 철수 이후 미국의 대 국민당 지원이 한동안 중단됨에 따라 기존의 정보라인을 대만에서 통제하기가 어려워져 일본으로 건너갔고, 또 일본에서는 윌로비 휘하의 G2 및 캐논 기관은 중국에서의 OSS협력 여부와는 또 별도로 이런 구 특무 Agent들에게 접근하여 강압과 회유로 자체 agent로 포섭한 정황이 보이며 이런 과정을 통해 구 OSS정보망과 그 공작계획이 GHQ G2로 넘어간 걸로 보여집니다 위 증언에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나가지마가 띤 또 하나의 임무인 대만 모병 건인 데- 이는 대만 의용군 백단 과 관계된 사안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대한 나가지마의 추가 증언은 없지만 위에 언급한 상황들을 볼 떄 이 대만 국부군 지원 도 GHQ G2 족으로로 넘어간게 아닐 까 합니다.따라서 GHQ G2/캐논기관의 대 중 공작 부문은 국민당 기관과 관계를 맺고 움직였을 것으로 보이고 이런 점에서 GHQ G2기관의 활동은 중국 백서 발표나 국민당 정권에 대한 군사 원조 중단 같은 미국의 전향적 분위기와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이며 공식정책 노선과는 벗어나서 어느정도 독자적으로 움직였다는 느낌이고이런 활동의 범위 속에 모택동 암살 건 (게획의 형태에 지나지 않더라도)이 포함되지 되어있을 수도 모른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여기에는 공식정책과 배치되는 이면적 정책의 존재나 또 워싱턴 내부에서 중국및 대만 건을 둘러싼 각 부처들의 견해 차 대립같은 여러 복잡한 상황을 상정해 볼 수 있으니 여전히 속단을 내리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추가 자료가 없으니 결국 추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세 번쨰로 제기할 만한 문제는 이 계획에 대하여 각 당사자들은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부여하고 이 임무의 성공가능성을 어느 정도로 보았았고 이 계획이 성공할 경우 후속조치는 어떻게 생각헀을까 라는 점입니다. 이 역시 앞에 제기한 문제들과 연겷되는 문제로 이 계획의 중앙 통제 여부 및 현지 실행자들의 재량과 관계되는 문제입니다. 중국 언론 보도들에 나온 내용을 보면 패망 이후 남아 있던 이들이 현지에서 짜낸 아이디어를 지휘부인 GHq에 보고해서 승인을 받아 일을 추진해 나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 다소 현지 공작원들이 주도한 듯한 느낌이 듭니다)
반면 나가지마의 증언에 따르면 모 암살 자체는 48년 북경 함락 직전 부터 계획된 것으로 다만 그 실행에 대한 구체적 사안이 리바나 야마구치를 비롯한 현지 agent에 맡겨진 듯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만으로 간 히 후에도 이 건은 계속 추진되었고 나중에 GHQ로 가게 되었다는 언급에서 볼 때 이 건 자체가 꽤 지속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추진되어 왔고 외부의 지휘를 받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건이 현지 공작원들의 주도적 발상에서 추진되고 GHQ를 비롯한 외부 지휘부가 이 건에 대해 "한 번 해볼려면 해보라" 는 식으로 소극적 지원 동조의 태도를 취했는 지 ,아니면 원래부터 수립된 계획을 일관적으로 지도헀는 지 여부가 엇갈리는 대목입니다. 이를 보려면 당시 나가지마 및 OSS현지 지국이 제기한 모택동 암살 건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고 어느 단계에까지 와 있었는 지, 단순한 발상 제안에 의하여 막 제시된 단게였는 지 아니면 어느정도 게획이 완성된 단계에서 그 실행에 대한 구체적 사안을 현지 agent들에게 담당케 하는 식이었는 지. 가 규명되어야 하지만 여기에 대한 자료나 근거가 없으니 자세한 건 미상입니다.
이러한 계획의 중요도와 관련되어 제기될 수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후속조치의 문제인 데 이는 이 게획이 구체적으로 추진되았던 50년 1월에서 9월 당시 극동 정세와 이 사건 폭로 전후에 벌어진 각종 사안들을 생각하면 꽤 흥미를 끄는 사안입니다. 이는 특히 당시 국민당 측과 관계된 사항으로써 이 계획에 대해 그들은 어떻게 생각했고 어느 정도로 관여하고 있었는 가 여부에 관한 문제입니다 . 물론 OSS 측이나 GHQ가 이 건은 국민당 정부에는 비밀로 추진했을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당시 상황으로 볼 때 국민당 정부 -아니 일부 기관및 핵심인사에 국한되더라도- 가 이 건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고 상상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공식적 협력은 아니엇더라도 각종 비공식 연락 연맥 관계에서라도 알고 있지 않았나 합니다) 과연 이 계획이 성공헀으면 그들은 어떤 후속조치를 취했을 런지 , 한국전 당시 거론되었던 국부군의 대륙 진공계획 건 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 까 하는 것과 같은 점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한국전쟁 발발 시 국민당 정부가 한국전을 어떻게 바라보았고 특히 중국 개입 이전에라도 이와 관련하여 어떤 시각을 가지고 어떤 조치를 취하려고 했는가 이런 점들은 한국전 당시 의 대만의 행동과 관련되어 무척 주목됩니다
뭐 이런저런 기사 조각이나 약간 신뢰성이 의문스러운 증언들-비록 그 일부는 개연성을 둘 수 있다고 하더라도 - 토대로 이런 저런 소리를 늘어놓았지만 역시 모르는 부분이 너무 많고 논리 자체도 허점이 많이 봉비니다.
아 아마도 미국 측에서 문서를 공개해 줘야 어느 정도 풀릴 것같지만 - 이건 아에 폐끼처분되었다는 소리도 있으니- 그런 일이 일어날 지도 의심스럽군요
어쩌면 대만 족에서 혹시 이 건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않을 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빛은 포모사에서인가?)
위에 언급한 각종 사항들 중 사실상 혹은 논리상 오류지적 혹은 제가 언급한 당시 상황에 대하여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사안 같은 게 있으면 지적해주기 바랍니다 대환영입니다